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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보다 빛났던, 학생의 가능성

살면서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지만, 우리는 매 순간 선택 앞에서 망설이고, 타인의 말에 갈등합니다. 특히 인생의 첫 갈림길이라 할 수 있는 고등학교 시절엔 그 흔들림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 ‘가고 싶은 대학’, ‘되고 싶은 사람’을 가슴에 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거치며 받아 드는 성적표는 때로 그 꿈을 흔들고, ‘점수에 맞춰 길을 바꿔야 한다’라는 조급한 판단을 하게 만듭니다.
최근 몇 년 사이, 학령인구가 줄고 과목별 선택형 수업이 확대되면서 일부 과목에선 1등급을 받는 학생이 단 2~3명에 불과한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등급을 지키기 어려운 구조 속에서, 아이들은 점점 ‘이룰 수 있는 꿈’만을 좇게 됩니다. 자신의 가능성과 열정을 외면한 채, 현실에 맞춰 꿈의 크기를 줄여가는 모습에 교사로서 마음 한켠이 무겁고 아려옵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 속에서도,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을 끝까지 믿고 지지해주는 어른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아이의 인생은 바뀔 수 있다고 믿습니다.
교사는 학생의 점수보다, 그 안에 숨은 가능성과 의지를 먼저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에 맞춰 꿈을 줄이는 대신, 가능성에 맞춰 현실을 넓혀가는 길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 믿습니다.
— 버트런트 러셀
저희 학급의 급훈은 ‘두려움 없는 도전’입니다. 모든 아이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그 가능성은 어떻게 갈고닦느냐에 따라 더 찬란하게 빛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사로서 학생을 지도하며 아이들의 역량에 한계를 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가능성에 한계를 두지 말자.’
2016년 서울시 교육청 진학지원단 활동을 시작하며 제 마음속에 새긴 약속이자, 진학지도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지키며 걸어온 시간 속에서, 우리 학생들은 점점 더 자신의 꿈을 줄이기보다는, 꿈을 현실로 바꾸는 방법을 배워갔습니다. 그 과정을 함께하며 진심으로 아이를 믿고 기다려주는 것, 그보다 더 강한 진학지도는 없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내신 성적 2.0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은 어디인가요?"
어느 순간부터 학생들은 교사에게 이런 질문을 당연한듯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교사들 역시 그 성적에 맞는 대학을 찾아 추천해 주는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내신 깡패”라는 말을 서슴없이 이야기하며, 내신이 좋으면 대학 진학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고교학점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내신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으면 자퇴를 선택하고, 검정고시를 통해 정시 준비에 올인하는 학생들의 모습도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입시의 방향이 학생들의 선택을 좌우하고, 교사들의 지도 방식까지 바꾸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본교의 사례를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흔히 “인서울 의학계열은 내신 1.3에서 마감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보다 낮은 성적을 가진 학생은 어렵다고 단정 짓는 교사들도 많습니다. 서울대 진학 역시 일반고에서 내신성적이 2.0을 넘기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본교에서는 매년 이와 같은 통념을 뛰어넘는 사례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본교에는 내신 약 1.5의 성적으로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에, 내신 약 2.0의 성적으로 수의과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이 있습니다.
1. 생명을 향한 질문, 실천으로 답하다.
수의예과를 꿈꾸는 학생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 꿈을 단순한 희망이나 동물에 대한 막연한 호감이 아니라, 깊이 있는 고민과 진정성 있는 실천으로 다져온 학생은 흔치 않습니다. 이 학생은 수의사라는 진로에 대해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생명윤리와 동물복지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윤리 수업 시간, '가축 살처분'을 주제로 한 토론에서, 학생은 살처분의 유효성과 윤리적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전염병 예방이라는 명분 아래 반복되는 동물 살처분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쳤습니다. 토론 이후에도 문제의식을 놓지 않고, 실제 수의사회의 입장이 궁금하다며 관련 단체에 직접 질의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는 학생이 단순히 자신의 꿈을 '말만 하는 학생'이 아니라 '이룰 수 있는 학생'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생은 바쁜 고등학교 생활 중에도 유기 동물 치료 지원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유기 동물 치료 병원의 처우 개선을 위한 건의 청원 활동도 꾸준히 하였습니다. 인권 보호 서명 운동의 홍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생명과 권리를 지키기 위한 작은 실천을 끈기 있게 이어갔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단순한 봉사가 아닌, ‘수의사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 질문에서 비롯된 실천이었기에 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학생을 보며 ‘서울대 수의예과에 보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진로에 대한 분명한 철학, 생명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 그리고 사회와 소통하며 끊임없이 실천하는 용기. 이 모든 것이 학생의 진정한 경쟁력이라 판단되었습니다. 물론 내신 성적만 보면 결코 유리한 조건은 아니었습니다. 고1 시절 영어와 수학은 1등급이었지만, 국어는 5등급, 그 외에도 2~3등급대 과목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생은 어릴 적부터 간직해온 ‘수의사’라는 꿈을 끝까지 놓지 않았고,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며 자신만의 역량을 차근차근 쌓아갔습니다.
진학부장이었던 저 역시, 단지 성적만이 아닌 뚜렷한 진로 목표와 준비 과정에서 드러나는 역량을 보고, 충분히 도전할 만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처럼 내신이라는 숫자 하나로 학생의 가능성과 미래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성적보다도 학생의 명확한 목표, 끈기 있는 노력, 그리고 그 가능성을 믿고 끝까지 함께하는 교사의 신념과 지원이라고 생각합니다.
2. 水滴穿石(수적천석) – 작은 물방울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결국 단단한 바위를 뚫는다.
점심시간이면 운동장 한쪽에서 배구 연습을 하던 학생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운동을 잘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체대를 준비하는 학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거의 한 달 동안 매일 30분씩 연습을 이어갔습니다. 친구들에게 부탁해 자신의 모습을 영상으로 찍고, 자세를 고쳐가며 반복 훈련하는 모습이 인상 깊어서 연습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은 “어제보다 나은 배구 실력을 만들고 싶어서요”였습니다. 알고 보니 학생은 배구 수행평가를 준비하며 연습을 시작한 것이었고, 이미 평가 만점 기준인 토스 40개를 넘긴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아지고 싶다는 의지로 계속 도전하는 모습에서, 작은 평가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겠다는 진심이 느껴졌고, 그 태도가 참 예쁘게 다가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이 학생을 눈여겨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학생은 체육뿐 아니라 모든 교과에서도 같은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물리Ⅰ에서 역학 단원을 배울 때는 문제 풀이 접근법에 어려움을 느끼자, 수업 직후, 방과 후, 하루 뒤, 일주일 뒤까지 총 네 차례나 교실에 혼자 남아 백지를 펴놓고 문제를 복기했습니다. 전날 푼 문제의 조건을 하나씩 떠올리며 논리 구조를 정리하고, 그 과정을 다시 쓰고 또 쓰며 사고를 다져나가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또 한 번은 의학 동아리에서 해부 실험을 준비하며, 조장으로서 윤리적 논의의 필요성을 먼저 제안했습니다. 실험 대상에 대한 감사와 추모의 마음을 나눈 뒤, 동영상과 앱을 활용해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며 실험을 준비했습니다. 조원들이 개복을 망설이자, 스스로 먼저 칼을 들고 시범을 보였고, 역할을 나누어 차분히 설명하며 조원들의 불안을 덜어주었습니다. 결국 학생이 속한 조는 가장 정교한 해부로 교재에 실리는 성과를 냈습니다.
학생은 이 과정을 통해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어떤 것도 시작될 수 없다"라는 것, 누군가 먼저 앞장서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후 나눈 대화에서 학생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리더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치의학이라는 길 역시 ‘손기술’이 아닌 ‘사람과 함께하는 마음의 기술’임을 깨닫게 되었다며, 따뜻한 마음을 지닌 치과의사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학생은 단지 성적 좋은 학생이 아닌, '성장을 멈추지 않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학생에게 서울대 치의학대학원을 진지하게 추천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스스로의 내신 성적을 이유로 서울대는 꿈도 꾸지 않았던 학생이었지만,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과 성찰을 꾸준히 반복하던 학생의 태도라면 충분히 도전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서울대는 단순히 점수를 뛰어넘는 학생,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닦으며 의미 있는 성장을 이어가는 학생을 기다린다고 했고, 이 학생이 보여준 ‘水滴穿石(수적천석)’의 태도는 바로 그러한 인재의 전형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水滴穿石(수적천석)’의 자세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학생은, 학업뿐 아니라 봉사활동에서도 3년 내내 꾸준함과 진정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특히 학교 교육과정을 성실히 이수함은 물론, 거점학교 과목까지 도전하며 학업에 대한 열의를 스스로 확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눈에 띄는 화려함보다 꾸준한 노력으로 가능성을 넓혀간 학생의 성장은 치의학과 진학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결국 진학지도는 단순히 성적표에 적힌 숫자를 맞추는 일이 아니라, 학생 개개인의 가능성과 역량을 발견하고 성장시키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교에서 서울대 치의학대학원에 합격한 학생은 작은 수행평가 하나에도 최선을 다하며,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해온 끈기와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수의과대학에 진학한 학생 역시 생명윤리와 동물복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행동으로 옮기며, 자신만의 확고한 진로 철학을 차근차근 쌓아갔습니다. 두 학생 모두 내신 성적만 놓고 보면 결코 유리한 조건은 아니었지만, 꾸준한 노력과 진정성 있는 실천을 통해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냈습니다. 이 경험은 저에게도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진학은 점수가 전부가 아니며, 아이의 열정과 성장 가능성을 제대로 바라보고 이끌어줄 수 있는 눈이 교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교사가 학생의 가능성을 믿고 끝까지 지지해줄 때, 아이들은 자신도 몰랐던 잠재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저는 앞으로도 점수의 높낮이에 앞서 학생 한 명 한 명의 역량과 가능성에 더 큰 가치를 두고, 그 가능성을 끝까지 키워주는 교사로 남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고 용기 있게 도전할 수 있도록, 언제나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깁니다.
선생님께,
이렇게 편지를 쓰는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서울대학교 합격’이라는 말이 아직도 제게는 꿈처럼 느껴져요. 결과를 받아 든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선생님이셨습니다. 제가 흔들릴 때마다 조용히 옆에서 방향을 잡아주시고, 늘 저를 믿어주셨던 그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수적천석(水滴穿石)’—선생님께서 자주 제게 해주시던 말씀이었죠. 눈에 띄는 재능보다 포기하지 않는 꾸준함이 제게 가장 큰 경쟁력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실감합니다. 사실 저도 제 내신을 보면서 스스로를 의심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를 누구보다 먼저 믿어주시고, “괜찮다, 할 수 있다” 늘 말해주셨던 선생님이 계셨기에 끝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거점학교 수업에 도전할 때, 밤늦게까지 수행평가 하나에 매달리던 시간들, 결과가 기대만큼 나오지 않아 속상했던 순간들… 그 모든 과정에서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과정이 쌓이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라는 말씀이 저에게 큰 위로이자 힘이었습니다. 한 번도 점수로 저를 판단하지 않으시고, 제 안에 있는 가능성과 노력을 먼저 봐주신 선생님의 따뜻한 시선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되든, 선생님께 배운 마음가짐과 태도를 잊지 않고, 언제나 진심을 다해 살아가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존경합니다.
치의학대학원 치의학과 재학생 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