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공, 나의 진로
돌아온 박연(朴堧)선생, 언어의 리듬을 타다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 수여’
‘최초 남북 학술 교류 학자’
‘최초 한글 전파 시도 학자’
이것들 이외에도 대단한 이력을 소유하신 이현복 교수님. 한국 언어학의 대부이신 분을 뵈러 가는데 깜빡하고 인터뷰 후에 드릴 선물조차 챙겨가지 않았다. 너무 준비 없이 찾아뵙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이 앞섰는데 교수님께서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필자와는 다르게 두 손을 모으시고 고요히 앉아계셨다. 교수님의 손자가 필자의 친구라서 동행해서 갔더니 …
“우리 손자 바쁠 텐데, 어떻게 데려왔나. 허허허!”
보통의 할아버지와 같은 인자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손자님은 바쁘지 않았다(웃음).
교수님 안녕하세요. 와! 55학번이시면 정말 저한테 대선배이십니다. 저랑 무려 오십칠 학번 차이가 나시네요.
예(웃음). 저희 학번을 서기 1955년, 단기 4288년 그래서 ‘쌍오쌍팔’ 학번이라고 부릅니다. 지금은 인문대지만 옛날에는 문리과대학이라고 불렀어요. 당시 문리과 대학은 서울대학 중의 대학이라고 불리는, 자부심이 대단한 학교였습니다. 정치 · 외교학, 언어학, 생물학, 물리학, 화학과도 모두 문리과 소속이었죠. 그러다가 관악으로 학교가 이전되면서 이공계가 자연대로 분리되고, 인문학은 문 · 사 · 철(어문, 사학, 철학)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럼 예전에는 공대와 문리과 대학만 있었던 건가요?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니고 문리과대, 법대, 예술대, 사범대, 상대, 공대, 의대, 치대, 농림과대학이 있었어요. 자연대는 따로 없었지요. 관악에 1975년으로 이전하면서 문리과 대학이 개편되었죠. 이학 쪽 학문들이 자연대로 분리되어 나갔습니다. 당시에는 저희 문리과는 문리과 대학 뱃지도 따로 있을 만큼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말씀에서 자부심이 정말 크게 느껴져요. 교수님은 학교를 지원하실 때 어떻게 언어학과에 지원하게 되셨어요?
저는 원래 공업학교에 다녔습니다. 1949년에 서울공업중학교에 입학했어요. 당시에는 정부가 나라발전을 위해서는 실업계를 양성해야한다는 기조가 있었기 때문에 농업학교, 공업학교가 유망했어요. 농업학교, 공업학교 등 실업계 특차를 먼저 선발하고 나서 나머지 사람들이 인문계 학교를 시험 봤어요. 대방동에 있는 학교인데 동양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학교였습니다. 저는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일을 좋아했기 때문에 전기과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학교를 다닌 지 1년도 안 되서 학제가 변경이 되었어요. 그 전까지는 9월에 학기가 시작이었는데 50년 4월에 학제가 변경되어서 신학기가 되었어요. 1학기 만에 2학년이 된 셈이죠. 그러다가 새 학기 시작되고 두 달 반 정도 학교를 다녔는데, 한국전쟁이 터졌어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저는 계속 공업학교에 다니면서 기술자가 되거나 공대 교수가 될 뻔 했습니다. 김일성이가 제 인생을 바꿔 놓았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허허허!
전쟁이 끝나고 1953년 9월에 서울 휘문고로 전학을 다시 갔어요. 인문계 고등학교로 갔으니 이쪽으로 진로를 정해야 하는데…. 우선 어릴 적부터 언어에 대한 관심이 컸어요. 일제 때에는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일본말을 배웠어요. 당시에는 일본말을 쓰지 않으면 매를 맞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말을 배우게 되었죠. 해방이 된 3학년부터는 다시 한글로 공부했죠. 중학교에서는 영어를 했고 고등학교에서는 독일어를 배웠습니다. 많은 언어를 배우다 보니 언어에 대한 관심이 생겼지요. 그래서 언어학과로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어학 중에서도 음성학을 전공하셨는데 음성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1955년 1학기, 즉 1학년 1학기에 ‘영어 음성학’ 강의를 수강했습니다. 그 때 제 스승은 런던대학에서 1938년에 석사를 받으신 김선기 교수님이셨어요. 김선기 교수님이 영어로 강의를 하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의 영어교육 수준이 참 낮아서 영어 강의가 신선했죠. 당시에는 원서를 구할 수도 없어서 학생들은 교수님의 강의를 노트 필기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저는 전쟁 당시 미군부대에서 일을 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미국 발음에 익숙해져 있었어요. 그런데 김선기 교수님은 완벽한 영국발음이었어요. 그래서 학생들이 받아 적지 못하고 옆에 학생 노트를 엿보는 상황이 벌어졌죠. 가령 ‘organ’을 영국에서는 ‘r’ 발음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오근’이라고 발음하셨는데 모두들 알아듣지 못했던 거죠. 그 때 영국영어와 미국영어 사이의 발음차이를 느끼면서 ‘말소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어요. 그래서 음성학을 연구한 것 같습니다. 1988년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할 때에도 문제가 된 게 공식영어를 미국으로 할지 영국으로 할지 논란이 되었죠. 통계상으로 볼 때는 영국영어가 훨씬 많기 때문에 영국영어가 공식 언어가 되었죠. 우리나라만 유독 미국의 영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미국영어가 전부인 줄 알죠. 재밌는 사실은 제 제자 역시 제 강의 첫 시간에 음성학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고 하더라고요. 저와 똑같이 느낀 셈이죠.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학문에 있어서 어떤 스승을 만나는지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일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거죠. 아이고! 내가 너무 혼자 떠들었나? 허허허!
교수님이 표준발음에 대한 열정이 남 다르시다고 들었는데 이유가 있었군요. 저는 교수님 말씀 듣기 전까지는 표준발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크게 느끼지 못했거든요.
(책상을 뒤지며) 여기 한국표준발음사전을 보세요. 이건 말의 악보라고 할 수 있죠. 가령 ‘사람’을 발음할 때는 악센트가 ‘사’에 있어서 ‘사아람’이라고 발음하고, ‘사랑’은 악센트가 ‘랑’에 있어서 ‘사라앙’이라고 발음하죠. 사람 이름도 전부 악센트가 있어요.
왜 표준적인 발음을 해야 하느냐? 첫째, 의사소통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함입니다. 발음이 정확치 않으면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있죠. ‘개’와 ‘게’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요새 사람들은 두 가지 다 적당히 뭉뚱그려 발음하기 때문에 구분이 불가능해졌죠. 부정확한 발음은 의사소통에 장애가 됩니다. 이건 마치 고깃간마다 저울 기준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둘째, 표준말은 인품의 척도입니다. 표준말이 잘 통용되는 사회에 표준말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진출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우리나라의 극심한 지역감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경상도가 득세해서 경상도 사투리 역시 득세했습니다. 당시에는 미아리에 가면 경상도말을 가르치는 학원이 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으니까요. 그 때 제가 KBS에서 표준말 사용을 강조하는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죠. 그런데 그 때 권력을 장악한 경상도 출신들에 의해서 검열에 걸려서 방송을 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지역감정을 퇴치하기 위해서라도 표준말과 표준발음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표준 발음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교육도 중요하겠네요?
표준 발음 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하자 1990년 제5차 교육과정 개정 때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가 ‘읽기’, ‘쓰기’, ‘말하기 · 듣기’ 이렇게 3개로 분할되었어요. 제가 ‘표준말 지킴이’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저를 중심으로 교수, 교사 20명이 ‘말하기 · 듣기’ 교과서를 만들었어요. 저는 4~6학년 말하기 · 듣기 교과서를 만들었지요.
책의 첫 단원을 보면 발음 문제가 나와 있었어요. ‘다음 낱말을 보고 선생님의 발음을 들어본 뒤, 정확히 발음해 봅시다.’ 그런데 지방에 가면 선생님들이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발음 부분을 넘기기 일쑤더라고요. 교과서에만 실려 있을 뿐 효과가 없었죠. 그래서 문교부에서 저한테 책의 실효성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묻더라고요. 저는 연수와 강의를 통해 발음교육을 하자고 주장했지만 예산 문제로 걸렸지요. 차선책으로 생각한 것이 EBS에 나가는 것이었어요. 1990년에 제가 폴란드에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가기 전에 EBS 발음교육 방송을 만들었죠. 폴란드에 다녀 온 뒤에도 계속 방송을 했죠. 그리고 발음교육 테이프도 만들었어요. 이런저런 노력을 했지만 쉽지가 않더라고요. 발음은 어릴 때 고정되면 바꾸기 어렵습니다. 음성학적 반복훈련을 거쳐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거의 쉽지 않죠.
교수님은 국내 교육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교육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문맹퇴치 이야기로 이어져요. 아직도 세계에서는 문자가 없는 부족들이 많아요. 저는 1994년 SBS와 함께 동남아를 답사했는데, 그 중에 태국 산 속에 사는 ‘라후족’을 찾아가게 되었어요. ‘라후족’을 만났을 때 저는 생김새, 식문화, 의복, 놀이문화, 음악 그리고 언어체계가 우리와 너무나 유사해서 깜짝 놀랐어요. 설에 따르면 ‘라후족’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얘기가 있어요. 고구려 유민 13만 명이 당나라로 끌려갔는데, 그 중 일부는 남쪽으로 계속 남하했다고 해요. 운남성, 동남아시아까지 이르렀다고 하는데 라후족 역시 고구려의 후예가 아닐까 싶어요. ‘라후족’은 ‘라후어’가 있지만 문자가 없어서 선교사들이 보급한 로마자를 일부 쓰고 있더라고요. 저는 로마자보다 우리의 국제한글음성문자가 훨씬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이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했죠. 역시 유사성이 높아서 배우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습니다.
문맹부족에 우리의 한글을 전파시키면 국제협력에 굉장히 좋은 기회가 된다고 생각해요. 문맹인들 뿐만 아니라 문자가 복잡한 몽고 부족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에요. 언젠가는 국제한글음성문자가 세계에 보급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아요. 제 직계제자인 이호영 교수 역시 ‘찌아찌아족’에게 문자를 보급했죠. 그러나 대부분 기관들의 지원이 1회성이고 홍보목적이 강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교육이 어렵습니다. 후원기관들이 먼 안목을 가지고 진행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할 필요도 있어요. 교육자들을 양성하고 지속적으로 파견하기 위해서는 한 개인의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교수님께서 최초의 남북한 간의 학술 작업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하시게 된 건가요?
제가 폴란드에 90년에 갔을 때는 아직 한국과 수교도 하기 전이었죠. 저는 바르샤바 대학의 조선어과에서 강의를 했었는데 폴란드는 공산권이다 보니 북한 교수가 파견 나와 있더라고요. 그 교수는 여러 해 동안 북한의 ‘문화어(한국의 표준어에 해당)’를 기준으로 폴란드에서 한국어 교육을 시키고 있더라고요. 냉전이 끝난 뒤 한국 정부에서도 공산권에 남한의 언어와 문화를 전파할 필요가 있겠다는 판단을 내려서 저에게 요청을 했고 저는 수락했습니다. 2년 반 동안 머물면서 체코, 슬로베니아, 러시아 등을 돌아다니면서 한국어 강연을 했어요.
당시 북한인 교수는 ‘노길룡’ 교수라는 사람이었어요. 폴란드 학생들이 노길룡 교수에게 북한 ‘문화어’를 배우다가 저에게 한국 표준어를 배우니까 혼란스러워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노길룡 교수에게 찾아가서 기본적인 교육방식을 통일하자고 찾아갔죠. 통일부에서 소정의 연구비를 얻어서 노길룡 교수와 함께 남북한 언어를 비교하는 연구 작업을 시작했어요. 작업을 완성한 후 제가 남한에서 출판하기로 합의했죠. 그런데 남북관계가 워낙 변화무쌍하다보니 출판이 계속 미뤄지게 되고 아직까지도 정식으로 출판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통일백서에는 이 작업이 남북한 최초 합작 학술작업이라고 기록되어있어요.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자신의 목표를 찾아서 하루라도 빨리 앞으로 전진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목표가 졸업 전에 다르고 석사 때 다르고 박사 때 다르고 하면 이게 얼마나 시간 낭비입니까. 인생은 생각보다 길지가 않아요. 자기가 목표로 하는 분야와 방향을 충분한 숙고를 통해 빨리 설정해서 매진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학문도 좋습니다. 물론 자신의 적성에 맞아야겠죠. 전문가들 얘기를 들어보면 세상만사에서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사람이 하루에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데 그렇게 1만 시간을 투자해야 한 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어요.
최근 제 언어학과 선배가 80세를 넘기셨어요. 20살에 대학에 들어와서 60년 동안 만주어에 매진하셨죠. 만주어는 지금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기록만 남아있는 죽은 언어입니다.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었기 때문이죠. 이 분이 왜 만주어를 전공했냐면 한국어가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데 몽고어, 만주어도 같은 계통이에요. 우리말의 기원, 역사를 따지기 위해서는 연구 도구로써 만주어가 굉장히 중요해요. 실제로 사용되지 않는 언어이고 돈도 안 되는 학문을 60년 동안 하신 거예요. 그러나 지금은 세계적으로 만주어의 대가가 되었죠. 이런 분이 큰 모범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 선생님을 보면 위대한 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만 시간이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지 빠르고 쉽게 이루려는 요즘 세태에 참 귀감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현복 교수님의 이야기는 한국 근현대사 그 자체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쉼 없이 자기 분야를 위해 살아오신 교수님을 보고서는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열정이 나오셨는지, 기자는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자신의 목표를 신중히 고민한 후 빨리 설정하라는 말씀이 어려워 보이기는 했지만 틀리신 말씀도 아니었다. 그런데 한편 현대 사회에서는 삶의 목표를 재설정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만들자는 주장 또한 많이 나오고 있다. 어떤 것이 옳은지는 답이 없지만 학생들 모두 한번 씩 고민해볼만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주말에 XX에서 밥 먹는 거 알지?”
“예, 할아버지!”
인터뷰 후에 동행한 친구와 교수님이 일상적인 가족의 대화를 하는 것을 보고 또 다시 보통 할아버지의 인자함과 푸근함을 느꼈다. 헤아리기에 꽤나 먼 미래의 내 모습일 수 있지만, 언젠가는 나도 할아버지로 그리고 어떤 분야에 큰 발자취를 남길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말이 자꾸 맴돌기 시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