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공, 나의 진로
내 재산 중에 가장 많은 것이 책이요
‘누가 조국으로 가는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서울대 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저 구절. 기자는 입학식장에서 선배님의 이 시를 인용하시던 총장님의 축사를 들으며, 입학한다는 사실에 설레던 그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서울대 학생에게 자긍심을 팍팍 불어 넣어주시는 저 구절의 주인공 정희성 선배님을 만나러 가는 시간, 지하철 안에서 그때의 벅찬 순간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달에 연락드렸을 때 바쁘다고 하셔서 오늘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되네요.(웃음)
얼마 전에는 큰 문학상(구상문학상)도 타셨는데,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웃음) 그때는 연말이라 모임이 많았어.
1964년에 입학을 하셨습니다. 제가 인터뷰하는 선배님들 중 유일하게 관악에서 생활하지 않은 분이십니다.
그렇지. 혜화에서 대학원까지, 거의 70년대 초까지 지냈어. 혜화동 대학로(지금의 마로니에 공원)에는 문리대가 있었고. 그리고 학교를 관악캠퍼스로 옮길 때, 기공식 때 축시를 썼었는데 정작 나는 전혀 다니지 못했어.(웃음)
그 시 잘 알죠! 왜냐면 입학식 때 총장님 축사에도 인용되었거든요.
학생회관 카페에 가면 벽에 쓰여 있기도 해요.
그걸 쓸 때가, 대학원 다닐 때였지. 당시에 지도교수님이 학생들 중 축시를 쓸 만한 사람이 누가 있는지 요청을 받으셨는가봐. 그 때가 70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였으니까 아마도 나를 추천하신 것 같아. 그래서 내가 ‘될지 모르겠네요…’ 하면서 해 보겠다고 했지. 당시에는 지금의 관악캠퍼스 자리가 골프장이었는데, 교수님이 나를 데리고 가서 건설본부장한테서 브리핑을 받았었어. 내가 시를 쓸 테니, 시상이 잡히도록 해 주신거지. 그렇게 브리핑을 듣고, 관악산과 캠퍼스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담아온 거야. 작품을 쓰고, 원고료도 제법 받았을 거야. 첫 원고료.(웃음) 아, 그리고 기공식 때 내가 읽기로 되어 있었나봐. 그런데 그 자리에 대통령이 오기로 되어 있었던 거야. 기공식장 입장하는 게 까다로웠는데, 내가 대학원생이다 보니 옷으로 신분을 증명할 수가 없잖아. 그래서 내가 입장을 못하고, 당시 급히 교복을 구해서 입었던 후배가 대신 읽었지. 원래 내가 읽을 걸로 생각하고 연습까지 했었는데 말이야.(웃음) 아무튼, 그 시가 서울대 학생들한테는 긍지를 심어줄 수 있는 구절이겠지. ‘누가 조국으로 가는 길을 묻거든, 눈을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멋있게 느껴지기도 할 거야. 그런데 뭐, 다른 학교 학생들한테는 “서울대학교만 대학이냐?”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네.(웃음)

문제집에서 만나게 되는 현실이 내심 편하지만은 않으신 듯하다.
선생님께서 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가 분위기가 어땠나요?
글세…. 그 60년대 중반 정도, 한일회담이 그 무렵이지. 반대시위 하느라 시위대열 쫓아다니던 기억이 있어. 시위하면 학교 위치가, 경찰들이 혜화동 로타리에서 막고 종로 5가 쪽에서 막으면 오갈 데가 없는 데거든.(웃음) 그래서 꼼짝없이 갇혀서 최루탄 냄새 맡고 그랬지. 하도 시위하고 하니까 캠퍼스를 관악산으로 옮기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가 있었는데, 거기에 내가 축시를 쓰니까 그거에 대해서 친구들이 당시 탐탁찮게 생각했던 기억도 나네. 데모도 못하게 하려고 옮기는 건데, 왜 거기에 축하를 하느냐, 그런 거였지.
대학교를 다닐 때 등단하셨는데, 원래 시인이 꿈꾸셨나요?
시인이라기보다는 문학에 뜻을 뒀었지. 국문과를 갔던 것도, 고등학교 때 책을 정말 많이 좋아해서 소설도 끼적여보고 했었어. 그러다가 학부생 때 ‘대학문학상’에서 내가 시에도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한번 응모를 해봤는데, 탁목조(啄木鳥), 말하자면 딱따구리지, 그걸 제목으로 시를 썼던 게 당선이 됐어. 상을 받은 이후에 자연스럽게 신춘문예에도 참여하게 된 거지.
문학을 좋아하게 되신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내가 용산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때 문예반이 있었어. 거기서는 매년 ‘청맥 문학발표회’라는 걸 했지. 학생들이 시를 써서 발표하고 으스대고,(웃음) 여학생들 초청해서 하는 걸 보니 나도 하고 싶더라고.(웃음) 그래서 그 때 실제 활동은 안 했지만 문학에 눈을 떴고, 그러다가 막판에 국문과를 선택하게 된 거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셨는데,
듣기로는 68년에 안타깝게 안 되고 70년에 수정해서 다시 내셨다고요?
학사 졸업논문을 쓸 무렵 시를 한 편 썼는데, ‘변신(變身)’이라는 제목으로. 그걸 신춘문예에 처음 응모했던 게 68년일 거야. 근데 떨어졌지. 심사평을 보니 내 이름이 나오더라고. 아마도 마지막에 이거냐 저거냐 하다가 밀렸던 것 같아. 심사평에, “옥석이 있다.”고 그러더라고. 옥도 있고 돌도 있다, 다시 말해서 좋지만 눈에 거슬리는 게 있다는 의미지. 그러고 잠시 그걸 묻어둔 채로, 학사 졸업과 동시에 ROTC 임관해서 군대를 갔어. 한동안 군대에 있을 때는 별 생각이 없다가, 제대 즈음 되니 다시 생각이 나더라고. 군대에 있을 때의 짜인 틀에서 벗어날 때가 되어, 학교로 돌아오려고 하니까 시에 대한 생각도 돌아온 거야. 군대에 있는 동안에 시간이 지나면서 나 나름의 성장을 했던가봐. 그 때 냈던 시를 꺼내어 읽어보니, 문학 공부를 하지는 않았어도, 돌이 보이더라고. 옥인 줄만 알았던 그 시가 말이지.(웃음) 그래서 다시 수정해서 오기로 같은 곳(동아일보)에 낸 거였어.(웃음)
상금도 많이 받으셨나요?(웃음) 어디에 쓰셨나요? 아마도 첫 상금이었을 텐데요.
꽤 됐었지? 상금, 글쎄, 그렇게 보람 있게 쓰진 않았던 것 같아. 상금은 날개가 달린 돈 같단 말이지. 아마 술값으로 썼을 거야.(웃음)
이후 지금까지 꽤 긴 세월 문인으로서 살고 계신데,
선생님은 시대적으로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그대로 지나오신 분이시죠?
그 시간 동안 여러 일을 겪으시며 문인의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하셨을 것 같아요.
나는 문학을 하자고 마음먹고 나서 국문과에 입학했고, 고전문학을 전공했어. 그 이유가 뭐냐면, 내가 현재 위치에서 문학을 하려면 “과거의 전통을 알아야 내가 해야 할 문학적 역할을 알 수 있을 거다.”라고 생각해서였지.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알아야 현재 나의 좌표를 설정할 수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었어. 그런데 70년대가 어떤 시대냐 하면, 일단 경제적으로는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산업화를 겪던 시대잖아. 또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정권이 막바지에 장기집권을 획책하던 시대여서, 정치적으로도 굉장히 가파른 시대였지. 그래서 이런 시대의 맥락 속에서 어떤 문학을 할지 생각해보니까 “산업화 과정 속에서 소외당한 민중의 삶의 정서를 어떻게 표현해 낼 것이냐.”하는 문제와 “억압적인 정치 현실 속에서 자유를 부르짖으며 신음하고 희생당하고 있는 젊은 영혼의 넋을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있더라고. 그 두 가지 문제가 나의 문학적 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지. 그것이, 내 나름대로, 이 시대에 나에게 주어진 문학적 과제이며 몫이다 생각하고 시를 써왔던 거야.
선생님께서는 시인이시지만, 동시에 교단에서도 오랫동안 서셨어요.
내가 70년에 등단해서 시를 썼고, 교직생활은 72년부터 신촌 근처에 있는 숭문고등학교에서 했으니까.(선생님은 지난 2008년 퇴임하셨다.) 문학 경력과 교직 경력이 비슷한 셈이지.
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으셨다고 하셨는데, 이후 교사가 되신 건가요?
세 학기동안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네 번째 학기에 논문 제출을 앞두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교사가 된 거지. 수료만 하고 논문은 못낸 거야. 그 당시 내가 집안 형편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하는 입장이었어. 공무원 퇴임을 하신 아버지가 구멍가게를 하다가 아마도 그즈음 못하게 된 형편이었던 것 같아.
교사로서의 생활도 궁금해요.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칠 때 특별하셨을 것 같기도 하고.
막 부임했던 초기에는 당시 국어 선생님이 시를 쓴다고 하니까, 학생들은 퍽 신기해 했던가봐. 시 단원을 가르칠 때는 특히 기대를 많이 했던 것 같아. 그렇지만 뭐, 아직은 젊은 애송이 시인이 시를 알면 얼마나 알겠어. 그냥 그런 수준에서 가르칠 수밖에 없었을 뿐인데, 학생들 기대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던 거 같아.(웃음) 그래서 시를 가르칠 때 다른 단원보다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어. 오히려 학생들을 더 곤혹스럽게 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자습서에 나온 해설이 가끔 마음에 안 들었거든. “아, 이 시를 이렇게 보면 안 되는데?”하는 마음에 일단 참고서 내용으로 강의를 하고 시를 다르게도 볼 수 있다고 또 설명했단 말이야. 애들은 혼란스러워지고. “시험에 나올 때는 어떡해요?” 물으면 “그렇게 볼 수 있다고 알아만 두고, 내 설명은 지워버려라.”고 했지.(웃음) 나중에 나이가 들고, 이제 내 시가 시험에 나오는 시대가 되니까, 그것도 참 거북하더라고. 문제집에 나온 내 시를 들고 질문하러 오면 참 당혹스러울 때가 많았어. 문제의 의도와는 다른, 그런 실수를 안 하기 위해서 정답이 뭔가를 먼저 물어봤지.(웃음)
설명을 해주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어떻게 하셨나요?
완전히 아니라고 말하지는 못하지. 문제를 내신 분도 고심해서 낸 문제고, 나도 남의 시 다양하게 설명했듯 누구나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거니까. 그 분도 그렇게 볼 권리가 있는 거고. 그래도 설명을 맞춰하다 보면 궁색하긴 하지. 그래서 나는 객관식으로 시를 출제하기보다, 논술하며 느낀 대로 쓰게 하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해. 그러면 글쓰기 능력도 보고, 원고지 쓰는 법도 보고, 사고력, 감상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잖아.
교사로 재직하시며 현장에서 학생들을 보고 느끼시던 것이 있다면요?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기도 그 나름대로 입시경쟁이 치열했어. 나는 그런 틈에서도 상당한 양의 독서를 했고, 독서를 통해서 진로를 정한 사람이란 말이지. 적성검사를 한 것도 아니고, 성적이 맞아서 간 것도 아니었단 말이야. 나는 지금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책을 읽으며 고민할 여유를 줘야 한다고 봐. 독서를 통해서 자기의 길을 깨닫고, 자신이 깨닫지 못한 천재성이 어디 있는지 스스로 발견하게 해야 한다는 거야. 그렇게 결정해야 흔들리지 않고…. 요즘은 그런 거 없이 갈 길 가다 보니까, 실패를 하는 경우가 많잖아.
선생님께서는 어릴 때부터 책을 정말 많이 좋아하시고, 많이 읽으셨나 봐요.
교과서에 등장하는 책 이름이나 저자 이름 이런 게 여럿 나오잖아. 나는 그걸 보면 그 사람들 책에는 어떤 게 있는지 궁금해서 당시 그 책을 읽을 능력이 안 되었어도 서점에 가서 일단 봤단 말이지. 그 중 몇몇은 사다가 보기도 했고. 나는 영등포에 살았고, 영등포 로터리에 있는 시장에 제법 큰 서점이 하나 있어서 그 서점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당시 아버지가 공무원이라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 서점에 가서 내가 달아놓은 외상을 갚아주고 그랬어. 아버지가 보증했거든, ‘얘가 보고 싶어 하는 책은 다 줘라.’하고 말이지. 그래서 재산 중에 가장 많은 게 책이야. 집에서는 좋아하지 않았어. 감당이 안 된다고.(웃음) 지난 번에 교직 퇴임하면서 책을 재직하던 학교에 기증하고 왔는데 아직도 쌓인 책이 엄청 많아.
학생들이 이 글을 많이 읽을 텐데, 한 번 더 책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강조해주세요.(웃음)
책을 통해서 자기 길을 찾기 바라는 거야. 자기의 잠재적인 능력을 책을 통해서 발견했으면 하고. 그렇게 진로를 결정하고 대학을 가면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거야. 난 문학의 길로 들어서서 돈도 없고 외롭게 살았지만, 후회는 없어. 책을 많이 읽었고, 내가 선택했고, 누가 가라고 한 거 아니니까. 그게 제대로 된 인생 아니겠어? 누군가는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고 과학자를 꿈꾸고, 또 누군가는 좋은 소설 한권을 읽고 글을 쓰겠다고 나서고…. 그렇게 독서하며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도록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으면, 덧붙여 그런 교육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야.

문인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문인의 길이라는 건, 물론 자기 마음이 이쪽으로 기울면 가야겠지만, 마냥 낭만적이고 쉬운 길은 아니야. 몇몇 성공한 소수 외에는 힘들지. 낭만만 가지고 할 수 없어. 사명감을 가지고 가야하는 길인 것 같아. 신중하게 선택해서 가야한다는 거지.
마지막 말씀 해주세요!
뭐 앞에 다 얘기했는데, 또 하나?(웃음) 독서! 지금 같아서는 가만히 있다고 독서시간을 줄 것 같지가 않아. 자기가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책을 읽기를 바라.
선생님과 인터뷰를 진행한 곳은 안국동에 위치한 한 카페였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한 탓에 기다려야겠구나 하며 카페에 들어갔는데, 선생님께서 미리 와 계셨다. 나중에 이야기해 주신 것은 그 카페에서 종종 동료 문인들과 모임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선생님께서는 70년대 활동한 문인들의 모임이 이렇게 이어지는 경우가 흔치 않다고도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글을 통해서 세상을 만나고 있었고, 때로 직접 세상을 만나며 글로 그것을 나누고 계셨다. 1시간 남짓한 시간 짧았지만, 문학 인생을 전해 들으며 또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느껴지는 말씀을 들으며 기자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너무나 감사했다. 왜냐하면 시대를 온몸으로 겪으신 흔적이 묻어나는 선생님의 문학적 사명감 앞에 다시 한 번 삶에 대한 책임감을 다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선생님께 대추차 정말 맛있었다는 말씀 전해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