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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공, 나의 진로

더불어 성장하고 함께 나누는 삶과 공동체

사회과학대학 정운찬

정운찬 선배님을 한 마디로 소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학자, 총장, 국무총리, 야구인, 그리고 동반성장 전도사까지, 기자라면 하나만 감당해도 벅찰 굵직한 푯말들이 선배님의 인생 여로 곳곳마다 자리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정운찬 선배님을 찾아뵈었을 때, 선배님께서 그동안 걸어오신 삶의 궤적들은 비록 그 모습은 다양할지라도 하나의 방향을 향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릴 적 어머님과 스코필드 박사님의 가르침을 지금까지 따르고자 노력하신다는 정운찬 선배님. ‘더불어 성장하고 함께 나누는 삶과 공동체’를 꿈꾸시는 선배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회과학대학 정운찬

선배님께서 경제학과로의 진학을 결심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학문은 패션처럼 유행이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1960년대 중반은 이공계 전성시대였지요. 집이 가난했던 나는 얼른 취직하고픈 마음에 당시 가장 인기가 있던 화공과로의 지원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갈 때 학교에서 문‧이과 수요 조사를 했는데, 문과 지망생 숫자가 너무 적어 선생님들이 난리가 났어요. 학생들을 문과로 끌어 오기 위해서 선생님들께서는 반을 돌아다니며 ‘각개격파’에 나셨었죠. 그러더니 어느 날 생물 선생님께서 우리 반에 들어오셔서 교정에 있는 나무를 아는 대로 써내라고 하시는 거예요. 도저히 모르겠어서, 또 질문이 시시해 보여서 5개만 써서 제출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저더러 관찰력이 부족하다며 문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웃음). 원래 이과 지망생이었던 내가 경제학과에 진학하게 된 첫 번째 이유예요.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군요. 당시 문과에도 여러 학과가 있었을 텐데, 그중에서도 경제학과를 고르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문과로 진로를 바꾸고도 경제학과 법학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나보고 집안에 여러 대째 정승이 끊겼다면서 법학과를 가서 고시를 보면 되겠다고 오히려 문과에 가게 된 게 잘 되었다고도 말씀하셨죠. 그런 나를 경제학과로 이끌어주신 분이 바로 스코필드 박사님과 김근태 선배입니다. 김근태 선배는 내가 판사가 되기에는 우유부단하고, 검사가 되기에는 마음이 약하고, 변호사가 되기에는 너무 정직하다며 법학과는 나와 안 맞다고 충고하셨어요. ‘그럼 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해서, 중학교 때부터 나를 재정적으로 후원해주시던 스코필드 박사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님은 당시 대한민국이 하루빨리 경제 성장을 이룩해야 민주주의도 완성할 수 있다고 하시며 경제학과에 진학할 것을 권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박사님께서는 한국의 분배 불평등은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고 안타까워하셨죠. 스코필드 박사님은 내게 분배의 불평등, 소득 격차 등 사회의 부정의를 줄이기 위한 방안을 연구하는 학과에 가서 공부하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스코필드 박사님의 진심 어린 격려 덕분에 나는 경제학과로의 진학 결심을 굳힐 수 있었어요.

경제학과에 진학하신 이후, 제일 하고 싶으셨던 일이나 목표가 있으셨나요?

여러분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거예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줄곧 학교 공부만 했으니 대학에 들어와서는 다양한 독서나 동아리 활동을 해보고 싶었죠.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집안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가정교사를 했습니다. 가정교사로 일하며 한 달에 월급 3천원을 받아 어머니께 드렸는데, 이따금 돈이 남을 때면 청계천에 있던 헌책방으로 갔습니다. 그 시절 구입한 책 중 하나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에요. 원본을 축약한 문고판 영문 서적이었는데, 사전을 찾아가며 띄엄띄엄 읽었지만 교과서에 언급된 고전을 내 힘으로 해득한다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었죠. 대학에 들어와서도 그런 기쁨을 다양한 독서를 통해 많이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대학 시절 동아리 활동은 어떠셨나요?

물론 동아리 활동도 많이 하고 싶었죠. 그런데 동아리 면접 시험에서 떨어졌어요(웃음). 당시 상과대학에 ‘경우회(經友會)’라는 경제연구 동아리가 있었는데, 사실 그 동아리엔 마르크스의 서적을 읽고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면접 질문에 적절하게 답변하지 못했던지 그만 탈락해버렸죠. 면접에서 떨어진 후엔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산하 경제복지회(EWS)에 가입하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대학생 시절에도 가정교사 생활을 하느라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못했습니다.

선배님께서는 학창 시절 어떤 학생이셨는지 궁금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도 그렇겠지만, 비교적 모범생이었다고 생각해요. 다만 마냥 얌전한 학생이었던 것만은 아닌 것이, 당시 있었던 학생 데모에는 거의 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주동자는 아니었지만, 고등학생 때는 학우들과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었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부정 선거 규탄, 3선 개헌 반대 등 격렬한 시위에 대부분 참여했죠. 당시 대학생들은 불의를 몰아내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의협심과 열정으로 넘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도 그 대다수의 학생들 중 한 명이었고요.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가신다면 어떤 일이나 공부를 해보고 싶으신가요?

공부보다는 교과 외 활동을 해보고 싶군요. 예를 들어 야구부에 가입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야구만 하는 거죠.

연설사진

선배님의 야구 사랑이 유별나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야구를 사랑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야구를 하는 동안에는 가난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어요. 몸집이 크진 않지만 발이 빨랐어서, 경기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야구부에서 활동하기도 했었죠. 운동에 소질이 있다는 말도 자주 들었고요. 하지만 주전 선수는 못 되고 ‘주전자’ 선수로 활동했었습니다(웃음). 야구선수로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 적도 많아요.

야구를 하실 때 어떤 포지션을 맡으셨나요?

몸이 작으니까 내야를 봤죠. 유격수는 수비 범위가 넓으니 내가 하기가 힘들었고, 주로 2루수나 3루수를 봤었습니다.

한국은행에서 재직하시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원래 나는 집이 어려워서 유학은 생각도 못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곤 어머니의 고생을 덜어드리기 위해 하루빨리 취직하고 싶었고, 운이 좋게도 졸업하던 해에 한국은행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죠. 한국은행 외환관리부에서 1년 가까이 일했는데, 어느 날 대학 은사셨던 조순 선생님께서 뜬금없이 유학을 가라고 권하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유학이란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돈도 들고, 시험도 봐야 하고. 당시 내 상황에서 유학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지만, 조순 선생님은 그런 나를 붙잡고 미국 교수님을 소개시켜주시며 다시 한번 유학을 권하셨어요. 어머니와 집안 살림을 생각하면 앞이 막막했지만, 선생님의 격려 덕분에 짧은 기간 동안 토플(TOEFL)과 유학 시험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외국에서 석학들과 경쟁하며 공부하고 싶다는 열정은 늘 있었죠.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나처럼 가난한 사람은 유학가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유학을 결심하게 된 것은 온전히 은사이신 조순 선생님 덕분이죠.

당시 해외에서 수학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셨을 것 같습니다.

그랬죠. 그때는 비행기 푯값도 매우 비쌌기 때문에, 유학 생활을 7, 8년 하는 동안 한국에 한 번도 오지 못했습니다. 마이애미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딴 뒤 1972년엔 프린스턴대학교로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박사 학위를 딴 후엔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교수 생활도 약 3년 동안 했었죠. 그러다 1976년 서울대학교에 처음으로 교수 공채 제도가 생겼어요. 당시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을 지내시던 조순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대 교수직에 지원해서 1978년 말 모교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내가 서울대학교 교수 공채 1기에요(웃음).

지금까지 경제학자, 대학 총장, 국무총리 등 다양한 길을 걸어오셨는데요. 재직하시면서 추구하셨던 목표는 무엇이었나요?

서울대 총장으로 취임할 때 전임 총장이셨던 조완규 박사님께서 나에게 조언해주신 말이 있어요. ‘Not to govern, but to serve.’, 지배하려 하지 말고 봉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조언이 나의 공직 생활에 척도가 되었지요.
서울대 총장으로 있을 때에는 대학자율화와 다양화가 제일의 목표였어요. 대학자율화를 위해 정부와 치열하게 투쟁했고, 다양화의 일환으로 지역균형선발제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문화적, 지역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캠퍼스 안에서 조화를 이룸으로써 대학교육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었습니다만, 당장 미국만 봐도 일개 대학, 일부 지역이 고위층을 독점하는 사례는 없습니다. 다양성이 결여된 집단에서는 창의성이 발현될 수가 없지요. 창조적 지성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대학이 다양화되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서울대 기초교육원 설립, 자유전공학부 신설, 해외교류 활성화도 총장 재직 시절 이루어낸 성과라 할 수 있겠네요.
이후엔 우리나라의 저성장과 양극화 문제를 함께 해결하자는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 국무총리로 재직했었습니다. 당시엔 남북 관계가 무척이나 경직적이었기에 이를 해결하고픈 욕심도 있었죠. 물론 당시 예상치 못하게 불거졌던 세종시 수도이전 문제 때문에 다른 목표들에 기대만큼 집중할 수 없었던 부분이 아쉽습니다. 나는 세종시가 경제도시, 문화도시, 과학도시가 되기를 바랐어요. 지역주민들과의 소통을 위해 임기 동안 16번이나 찾아뵙기도 했었죠. 다만 결과적으론 나의 제안이 국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지금의 행정 중심 복합도시인 세종시가 만들어졌습니다.

인터뷰 사진

현재 선배님께서 이사장으로 계신 동반성장연구소의 설립 배경과 동반성장의 아이디어가 궁금합니다.

동반성장은 한 마디로 더불어 함께 잘 사는 것입니다. 더불어 성장하고 함께 나누자는 아이디어죠. 이는 성장을 해치지 않으면서 분배를 공정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자가 가진 것을 빼앗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자는 말이 아닙니다. 파이를 더 크게 하되, 나눔은 공정하게 하자는 것이죠. 21세기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 세계 곳곳에 한류 바람을 일으키는 문화강국, IT산업을 선도하는 첨단산업의 메카로 자리 잡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눈부신 발전 뒤에는 저성장과 양극화라는 두 가지 큰 문제가 남아 있죠. 2010년 반관반민의 동반성장위원회가 설립되면서, 이러한 한국경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동반성장이 주목을 받았어요. 나는 이 위원회에서 1년 반 동안 활동하다가 지난 2012년 위원회와는 별개로 순수 민간연구소인 동반성장연구소를 설립하게 되었죠.

동반성장이란 저성장과 양극화라는 한국경제의 문제점에 대한 선배님 나름의 해법이군요.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는 지금 중대 기로에 서 있어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짧은 기간에 눈부신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장기적인 저성장과 극심한 양극화가 사회 갈등을 증폭시키고 미래를 좀먹고 있죠. 이런 문제를 하루빨리 해소하고 국민 모두가 앞날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없는 안정된 삶, 안전한 삶,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동반성장에 그 해답이 있다고 믿고 있어요. 어쩌면 이는 학창 시절 내가 배운 스코필드 박사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선배님의 향후 계획과 목표가 궁금합니다.

나의 큰 목표는 한국 사회를 동반성장 사회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설립한 동반성장연구소를 더욱 활성화시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더 나은 한국 사회를 만들어 보려고 해요. 요즘은 ‘한국경제, 동반성장,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을 쓰고 있는데, 이런 것도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학생들이 진로를 선택하는 데 있어 참고해야 할 삶의 가치나 기준이 있다면 무엇을 추천하고 싶으신가요?

어려운 질문이네요(웃음). 자신이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 그리고 자신과 사회에 가치가 있는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물론 자기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배려하는 공동체 정신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또한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그 방법이 나쁘면 안 되죠. 목적뿐만 아니라 수단도 많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여러분 젊은이이기 때문이에요. 지식 못지않게 덕성도 중요합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마시고,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에게는 선행을 베풀기 바랍니다.

정현민 사진(사)동반성장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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