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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공, 나의 진로

전 세계의 사라져가는 전통 문화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싶네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최상일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직접적으로 접해 보지는 못했더라도 지나가다 들은 라디오 속에서나, 각종 패러디를 하던 TV 프로그램 속에서나 쉽고 친숙하게 접하던 이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오늘 만나는 선배님은 바로 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맡아서 제작해 오셨던 분이다. 비 오는 어느 가을 날 선배님을 뵙기 위해 선배님이 살고 계시는 구기동의 한 자택으로 향했다. 선배님은 편안한 얼굴로 필자를 맞이해 주셨다. 운치 있던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인터뷰를 시작하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선배님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여쭈어 봐도 괜찮을까요?

우선 나는 76학번이고, 2학년 올라갈 때 전공을 선택했었는데 사회학과로 진학했지. 당시에는 단순히 성적순으로만 선택했던 것 같은데, 당시의 나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론 지리나 고고학을 전공했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자신의 적성이나 흥미를 잘 고려해서 전공을 선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야. 여하튼, 당시 내가 사회학과에서 줄곧 공부를 했다면 사회학자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는 무척 혼란스러웠던 때지. 마음 편히 공부만 할 수 있던 때가 아니야. 독재가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지고 여러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학생들은 이에 저항해 싸우기도 했지. 나도 당시에 ‘사회학 심포지엄 사건’이라는, 민주화 항쟁 운동에 참여했었어. 당시 농성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당시 학교 측의 해명이나 변호는 없고 오히려 학교는 구속된 학생들을 제명하기도 했지. 사건을 겪고 나니까 학생들을 보호조차 안 해주는 학교에 심리적 거부감이 들더라고. 오히려 투쟁의 의지가 더 불타오르기도 했지. 3학년에 복학이 되었고 이후에도 몇 차례 시위에 더 참여했었어.

굉장히 힘든 시절을 보내셨던 것 같네요. 그러면 라디오 PD의 꿈은 이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건가요?

그렇게 대학 생활을 마치고 졸업을 했는데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못하다보니 뭘 하고 살아야 하는지 막막했지. 사회학과는 진로가 뚜렷하게 정해진 전공은 아니다 보니 교수의 길은 학문에 큰 뜻도 없거니와 학비도 꽤 드니까 제쳐두었지. 당시에는 사회학과 출신의 기자가 상당히 많았어. 그 시절은 대다수가 취직은 잘 됐기에 나는 기자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 그런데 시위에 참여했던 전적이 있는 사람들은 신문사에서 받아주질 않는 거야. 합격을 한다 해도 퇴사를 쉽게 당하는 거지. 그래서 별 수 없이 기자는 포기하고, 여러 회사 이곳저곳에 입사 시험을 많이 봤어. 심지어는 건설회사까지 지원을 했었지.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후 MBC에 입사를 하게 되었어. 여러 부서에서 사람을 뽑던 중 나는 PD를 선발하는 자리에 합격을 했지. 당시에 PD는 TV 부문 PD와 라디오 부문 PD를 동시에 뽑았어. PD에 합격을 했는데, 내가 대학 시절 학생 운동에 가담하여 경찰에 연행되었던 사실이 알려진 뒤 사측은 시위를 했던 과거 일을 들먹이며 언론인으로서는 선발을 못 하겠다는 거야. 당시의 언론인으로서 기자 영향력은 어마어마했기에 권력의 힘이 많이 작용했던 것이지. 방송사에서는 행정이나 인사 업무 부서로 빠지라고 권고를 했는데 “나는 언론인이 되려고 들어왔다. 행정 일은 나와 거리가 멀다.”라고 했지. 그러다가 라디오국 소속의 음반자료실 업무로 빠지게 되었어. 정확히는 사서 업무를 담당한 것이지. 사서직을 갖고 있었지만 당시 부장의 직권으로 2년 만에 라디오 PD가 되었어. 당시 FM라디오는 거의 24시간 음악방송의 성격을 띠고 있었어. 그런데 내가 음악을 많이 접했던 사람은 아니었기에 이 기회에 여러 음악을 들어볼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지. 지금과 달리 그때는 음악의 장르가 굉장히 다양했어. 요즘의 월드뮤직이라는 라틴 음악, 유럽계 음악 등을 많이 접해 볼 수 있었어. 이후로 6년 정도는 여러 프로그램도 맡아 보면서 점차 음악을 좋아하게 됐지.

그러면 특별히 우리나라의 민요에 관심을 가지시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민요는 알게 모르게 나와 거리가 가깝던 존재이기도 하였지. 내가 대학을 다니면서 얻은 게 있다면, 당시에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꽤 많았는데, 1,2학년 때 판소리 강습을 들었던 적이 있어. 탈춤패로도 활동을 했었고. 문화운동의 일환으로서 이런 활동들이 꽤나 활발한 편이었지. 또, 학생 때 ‘농활’이라고, 농촌을 가서 농민들 일도 돕고 연대하는 활동이 있는데 2학년 여름방학 때 농활을 갔었어. 당시 할머니가 ‘콩밭 매는 소리’를 하셨는데 처음 듣는 그 소리에 충격을 받았지. 내가 처음 듣는 노래로부터 이러한 감동과 전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 충격을 받은 거야. 오리지널 전통문화를 체험한 셈이지. 난 고향이 여주인데 서울로 이사를 왔어. 모든 식구가 이사한 것은 아니고 나와 큰누나만 서울로 와서 공부하게 되었지. 그 때가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었을 거야. 당시 서울도 정월대보름 같은 날에는 상가 지역에 풍물놀이가 며칠 간 벌어질 정도로 전통이 살아있던 시절이야. 그러니 고향에서 내가 자라며 자연스레 보고 들은 풍물과 상여소리 등 우리 전통예술문화는 얼마나 더 풍성했겠어? 어린 나의 뇌리에 깊이 자리할 수밖에 없게 된 거지.
또, 어릴 때 집에 전축이 있었는데 당시 전축으로 들을 수 있던 집안 LP판의 절반은 전통음악이었어. 당시의 대중음악의 축을 형성하고 있던 게 전통음악이야. 비록 오늘날에는 서양음악이나 일본의 트로트가 들어오면서 쇠퇴하긴 했지만 말이야. 대중문화의 바탕이 되던, 간간이 접한 전통문화를 보고 느끼며, 어렸을 때부터 받았던 감동들이 방아쇠가 된 셈이지. 이후에 음악 PD가 됐으니까 잊혔던 민요들에 대해 조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민요에 대한 기획안을 냈지. 그런데 부장, 선배들의 부정적인 시선이 많았어. 재미도 없고 어렵기도 할 것이라는 거였지. 하지만 새로운 시도니까 해보자는 의견도 있었고 일을 시작하게 됐지.
간신히 프로그램을 시작하였지만 의외로 순항할 수 있었어. 자료가 생각보다 무척 많았던 거야. 민요가 남아있던 게 정말 많았던 거지. 행복한 비명을 질렀어. 구전의 힘이라는 게 매우 강력하단 걸 알게 됐어. 무형문화재 팀들도 많았고 마을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이에 버금갈 정도로 민요를 잘 부르셨지. 기획 후 7년 동안 출장을 정말 많이 다녔어. 1년 중의 절반은 돌아다녔지. 민요는 노인들 한 분 한 분이 곧 민요 자체이기 때문에 이들을 만날 시간과 인력이 부족해서, 다섯 팀으로 나눠 각 지역별로 조사를 나갔지. 당시 70세 정도 되신 분들이 주된 가창자 층이었어. 8.15 해방을 기점으로 해서 그 이전 출생하신 분들이 민요 세대인 거지.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점도 많이 느꼈지. 한국전쟁 이후에 많은 전통이 사라졌다는 거야. 그래서 그 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서둘러 조사를 시작해야 했지. 지금 돌이켜보면 참 안타까워. 60년대 이후 산업화, 경제 개발 정책으로 정말 잘 보전해야 할 것들마저 사라져 버렸어. 당시는 경제 개발에만 급급한 나머지 전통을 파괴하며 일을 진척시켜 나갔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잘 보존된 지방의 많은 전통 문화가 별로 남아 있지 않게 되었어.

그렇군요. 이러한 생각들이 오히려 민요에 대한 애착을 불러일으키기에 좋았을 것 같아요.

매체가 가진 강력한 특징은 전통문화의 인식을 새롭게 하기에 좋았지. 당시에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라는 캠페인 비슷한 걸 했는데 대중들이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자꾸 들으니까 재미를 느끼게 된 거야. 라디오라는 소리매체의 특징은 대중들에게 음악적으로 전통문화가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지. 그래서 음악 분야의 종사자로서 민요에 대해서 더 조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시대적 흐름과도 일치했던 거야. 문화사적으로 본다면 이때가 80년대 후반이었는데, 경제개발기를 지나 문화적 수요가 높아지던 때야. 새로운 문화 트렌드에 대한 방송사의 요구도 생겼고.

사실 민요라고 하면 흔히 ‘아리랑’ 정도만을 떠올리기 쉬운데요. 이외에도 민요의 모습이나 종류가 다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민요가 어떤 음악인지, 또 실제로 현장 답사를 가시거나 조사를 하셨을 때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을까요?

우선 민요는 크게 ‘통속민요’와 ‘토속민요’로 나뉘어. 통속민요는 전문소리꾼들이 대중공연용으로 선보이는 민요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송소희’ 씨가 부르는 노래가 이런 종류에 속하지. 분명 창작자는 있었겠지만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아. 반면에 토속민요는 위로부터 구전되는 민요이자 농민, 어민, 산촌민들이 필요에 의해 부르는 노래인 거야. 토속민요는 집단창작의 성격을 띠지. 지역단위로는 비슷하지만 동네마다 다르게 발전해. 구전되다 보니까 조금씩 변화를 하고, 자급자족의 성격을 가지지. 그러니까 안 부르면 없어지게 돼 있던 거지. 기록이 없으니까. 이것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해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거야.
수집 과정은 기존의 자료를 바탕으로 내가 기초 지식을 쌓고 마을 이장들부터 설문 조사를 시작했어. 이장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설문지 작성을 부탁해서, 그 마을에 민요가 남아있다 하면 조사를 하러 간 거지. 하나의 군 지역 당 1주일 정도가 걸렸는데 좋은 곳을 추려서 한 군당 다섯 개 마을, 많게는 열 개 마을 정도 조사를 시작했어. 본격적인 조사 때는 여러 장비를 갖추고 녹음을 시작했어. 마을 분들도 즐거워했어. 어릴 적 노래를 다시 생각해 내고 여러 준비를 해 오셔서 부르기 시작했어. 여기서 공동체적 삶의 즐거운 모습을 엿볼 수 있던 거야.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그 당시로, 노래를 부름으로써 돌아갈 수 있는 거야. 녹음기만 틀어 놓으면 마을 분들이 주체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조언도 많이 해주고, 맛있는 음식들도 거하게 대접해 주셨지. 동네잔치를 벌인 셈이야. 나도 어렸을 때 보던 풍물패 생각도 나고 말이지. 즐겁게 일에 임했던 것 같아.

 

민요를 녹취하는 현장 사진입니다.

 

 

민요를 녹취하는 현장 사진입니다.

어떻게 보면 선배님은 민요를 대중들에게 쉽게 알리는 데에도 큰 몫을 하신 것 같아요.

수집된 자료를 정리하고 공유를 시작했는데, 사실 여러 노인들로부터 전해 받은 노래들은 저작권 문제도 있고 해서 무료로 공유하게 된 거지. 이런 것은 방송국에서는 딱히 수익이 나지 않는 일이기에 주변에서 만류도 있었어. 하지만 나는 이 일을 끝까지 하겠다고 고집했지. 이렇게 즐겁고 보람도 있는 일을 그만둘 이유가 없으니까. 이후에 비슷한 노선으로, 무당굿도 3~4년 동안 녹음을 시작했던 거고. ‘민속기행’이라는 여행 다큐멘터리를 맡기도 했는데, 내가 만났던 소리꾼들의 일대기를 인터뷰를 했어. 마치 ‘구술자서전’인 셈이야. 마을의 토박이 최고령 노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인터뷰를 진행했지. 또, ‘백두대간 민속기행’이라는 책도 내고 방송도 했고. 이전에는 이런 자료를 다뤄본 사람이 우리 나라엔 많이 없었지. 물론 국문과나 이런 곳에서는 연구가 꽤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건 학술적인 접근이거든. 민요를 대중적으로 알리기에는 매체만한 것이 없는 거지.

 

전국을 순회하며 채록한 민요의 가치는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것이 되었습니다.

 

 

전국을 순회하며 채록한 민요의 가치는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것이 되었습니다.

한편 선배님은 10여 년 전에 북한민요전집 음반을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총괄하셨다고 들었어요. 북한의 민요는 아직 저희들에게도 생소한데요. 관련해서 한 말씀 해주실 수 있나요?

북녘 땅에도 민요가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프로젝트를 시작한 거야. 북한 본토에서 직접 취재를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그럴 수는 없었어. 아무래도 대민 접촉을 허용 안 하니까. 그래서 그 주변의 압록강, 두만강 일대의 조선족 촌을 거의 다 돌아다녔어. 그럼에도 생각보다 노래는 많이 못 건졌어. 그 지역은 이민자들의 역사를 지닌 땅이기 때문에 노인들을 만나 봐야 이민 3세대인 거야. 이민 1세대는 이미 돌아가시고 난 뒤였고. 그래서 노래 전승이 많이 안 되었어. 커뮤니티가 있어야 노래가 전승되는데, 가족 단위의 사회다보니까 노래가 별로 형성 못 됐어. 그래도 돌아다니면서 북한민요에 대한 정보는 많이 얻을 수 있었어. 북한에 녹음자료가 남아있을 수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지. 우리나라에 ‘조선민요곡집’이란 게 있었는데 이게 토속민요 악보집이야. 이런 악보집이 있을 정도면 녹음 파일 역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 원본을 찾아다녔고 추적에만 3년이 걸렸어. 결국은 관련 기관에 가까이 가는 분과 연락이 되어서 부탁을 하게 되었어. ‘토속민요’에 대한 음원이 있을 것이니 이에 대해 조사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어. 평양무용음악대학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자료를 구하려면 돈을 주고 구입해야 했지. 그래서 방송문화진흥재단에 지원비 부탁을 했어. 물론 당시에는 돈을 주고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주변의 우려도 많았어. 하지만 내가 어떻게 찾아냈는데 쉽게 포기하겠어. 나는 퇴직금을 걸어서라도 거래를 하겠다고 말했어. 나의 의지와 신념이 통했는지, 우여곡절 끝에 거래를 성공했어. 자료를 얻게 되니까 눈물이 막 나는 거야. 수백 곡의 노래가 담겨 있는 자료를 얻게 된 거지. 찾은 자료를 바탕으로 음질을 개선하고 가사도 채록하고 하면서 정리하니까, CD로 10장 분량이 나왔어. 2004년도에 나왔지. 최근에는 여기서 노래를 몇 곡 뽑아서 ‘유지숙’이라는 가수가 ‘서도소리’를 부르기도 했어.

정말 선배님은 민요를 알고 또 알리는 데 있어서 대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이 기사를 읽고 있을 학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민요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통로로써 중요하다는 점. 민요를 통해서 우리 전통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민요 속에는 사람들의 모든 면모가 들어가 있어. 의례적 측면, 유흥의 측면, 삶에 대한 신세한탄의 측면 등이 모두 들어있는 거지. 민요를 보다 보면 옛날의 공동체문화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어. 옛날을 공부함에 있어 민요가 좋은 기록물이 되는 거지. 만약 나중에 작곡이나 음악에 관심이 있는 친구가 있다면, 음악을 만들 때 우리 토속민요 중에 좋은 것이 참 많으니까 적극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또, 고등학교 때부터 본인 진로를 정하는 게 맞다 생각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자기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거지. 무조건 좋은 대학만 입학하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 같아. 열심히 고민하지 않으면 자신의 진로를 찾을 수 없어. 고민도 많이 하고 여러 어른들께 조언도 구해보고. 교육과정 상에 아예 이러한 시스템이 있다면 좋을 터인데. 이런 시스템이 없다면 본인 스스로라도 끊임없이 고민을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언론인을 꿈꾸는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PD라는 직업은 단순한 언론인이라기보다는 문화를 창조하는 직업이니까, 창의적인 생각으로 자신의 주관을 발전시켜 나가는 힘을 길렀으면 좋겠어. 남들이 다 하는 것을 좇지만 말고, 남들 안 하는 것에 답이 있으니까 자기가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분야들을 찾았으면 좋겠어. 자기가 지닌 소질과 적성을 빨리 파악했으면 좋겠어. 우리 나라의 문화적 특징 중 하나가 어떤 한 분야로 유행처럼 몰리는 경향이 많아. 남들이 ‘좋다’, ‘하겠다’ 하면 그곳으로 우르르 몰리는 거지. 이래서는 개인도 사회도 발전이 있을 수 없어. 직업 선택에도 다양성의 원리를 적용했으면 좋겠어.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목표가 되어선 안 돼. 자기만의 관심사를 발견해서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고,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지만 남들이 잘 안 하는 분야를 스스로 발전시켜 보았으면 좋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취미로부터라도 시작해서 다양한 경험과 체험을 하면 좋겠지.

 

책으로도 발간한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에 부록으로 음반이 실려 있습니다.

 

 

책으로도 발간한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에 부록으로 음반이 실려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는 무엇이신가요?

전통문화와 관련된 일을 계속 하게 될 것 같고 하고 싶어. 남들이 안 하지만 해야만 할 일을 찾고 싶고 하고 싶어. 또 우리나라뿐 아니라 지구촌에서 사라지는 문화에 대한 기록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 사라질 문화는 누군가는 기록해야 하는 거지. 전 세계의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 거창해 보이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거창한 일도 아니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같이 하면 되는 일이니까. 우리나라에서도 ‘광주아시아문화전당’이나 ‘아태무형유산센터’와 같은 곳들에서 문화 보전에 대한 여러 움직임들도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또, 넓게 보면 문화교류에 관한 일도 하고 싶어. 그리고 이제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나라로 여행도 다니고 책도 쓰고 취미 생활도 하고 싶어.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생각해. 자기 마음대로 달리는 마라톤. 끝이 어딘지도 모르고 길이 어딘지도 모르지. 그러기에 잘못 가면 되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한 마라톤이야.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 나서면서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어.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선배님은 많은 이야기들을 해 주셨다. 필자 역시 선배님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고 해주신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분량의 한계로, 또 기자의 필력이 좋지 못하여 해주신 말씀을 다 담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그 뜻을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했던가. 선배님의 말씀처럼 인생은 길게 보는 마라톤이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 또 노력하며 그 과정을 즐기는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사진김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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