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공, 나의 진로
그곳에 다른 삶이 있었던 거야
우연히 소록도에 가게 된 일을 계기로
37년간 애양원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봐오신 김인권 선배님.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이라고 불릴 때,
그 우연으로 자신을 바꾸는 삶이 있다.
“소록도, 그곳에 다른 삶이 있었던 거야.” 선배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바로 이곳에 그 다른 삶이 있군요, 선배님!’
애양원에서의 긴 여정을 마치고, 용인분당 예스병원에서 진료를 이어오고 계시는 김인권 선배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의사를 꿈꾸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요새 젊은 학생들, 청년들을 보면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앞으로의 자기 진로에 대해 목표가 뚜렷하잖아요. 예전에 의과대학 신입생 환영회에 가서 축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학생들이 몇몇 나와선 자기가 왜 의과대학에 들어왔는지 이야기를 하는데, 아주 주관이 뚜렷하더라고요. 미안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 처지가 되지 못했어요. 우리 때는 나라가 굉장히 가난했어요. 먹고 사는 게 제일 힘들었고, 그래서 어떤 주관을 갖고서 대학에 간 사람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어. 부모님께서는 내가 무언가가 됐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는 하시는데, 우리 집안에 의사가 많았어요. 그래서 당연히 그렇게 하는 건가 보다 해서 된 거죠. 내가 앞날에 어떤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그런 비전도 없었어요. 특별하게 꿈꾸는 게 없었지. 그때는 그냥, 앞으로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겠거니 싶었어요.
요즘 의과대학에 들어간다고 하면 굉장히 수재라고 생각하잖아요. 선배님께서는 고등학교 때 어떤 학생이셨을지 궁금합니다.
의과대학 들어가려면 얌전한 학생이어야 했지. (웃음) 시키는 대로 잘 하고. 그때도 의과대학 들어가기는 어려웠습니다. 자기주장 할 처지는 못 되고, 시키는 대로만 얌전하게 지냈어요.
고등학교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무전여행. 그런 게 유행이었거든요. 그때 당시 사회 풍조는 무전여행을 가는 거였어요. 여행객이 많지 않았어요. 다들 먹고 살기 어려웠는데 어떻게 여행을 다녀요. (웃음) 그래서 고등학생들이 무전여행을 다녔어요. 돈을, 차비 정도만 남기고 거의 없이 다니는 거죠. 고2 때 무전여행이 제일 큰 이벤트였어요. 대여섯 명이서 우리도 무전여행을 가자 그랬는데 그게 아주 일탈이었지. 서울에서 기차 타고 강릉, 강릉에서 기차 타고 포항을 갔는데, 거기서 또 한려수도를 보자 그래가지고 배를 타고 여수를 갔어요. 여수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군산, 거기서 대천을 들렀다가 서울에 왔어. 2주일 정도 다녀왔죠.
학교 다니실 적에 책도 많이 읽으셨을 것 같습니다.
책은 많이 읽었어요. 나는 워낙 책 읽는 걸 좋아해서, 어렸을 때부터 책은 많이 읽었어요. 역사를 좋아했죠. 특히 중국 역사. 중국 역사가 기록도 많고, 드라마틱하잖아요. 우리나라 역사는 미안하지만 기록이 없어요. 제일 오래된 기록이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려 때 기록이에요. 중국은 사실 ‘사기’만 해도 우리보다 천 년 앞이죠.
볼륨 자체가 다르네요.
그럼요. 이집트 역사는 더하죠. B.C. 3000년이잖아요. 성경도 그렇고. 물론 우리가 흔히 듣던 건 중국 역사죠. 지금도 사기열전은 옆에다 두고 가끔 봐요. 그렇게 역사책 많이 봤고, 문학책도 많이 봤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책은 무엇인가요?
내가 제일 열심히 본 것은 삼국지와 열국지 같은 책이에요. 삼국지는 한 수십 번 봤어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활약하잖아요. 그때는 아주 세상이 어지러울 때니까. 한창 전쟁 중이던 시절에 서로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나가는가 고민하는 모습, 그리고 뚜렷한 캐릭터들, 그런 것들이 참 좋았어요.
선배님께서 대학교에 입학하셨을 때 제일 먼저 하고 싶으셨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자네는 잘 몰라요. (웃음) 의과대학은 예과 때부터 고등학교에요. 자기 선택이 아무것도 없고, 몇 학점만 낙제를 해도 유급이 돼요. 그러니까 굉장히 살벌한 거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에 6시간씩 커리큘럼에 따라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예과 때는 다행히 한 학기 당 4학점은 자기가 듣고 싶은 과목을 선택할 수 있었어요. 의과대학이 예과가 2년이고 본과가 4년인데, 옛날에 예과는 문리과대학을 다녔거든요. 문리과대학에 갔더니 내가 좋아하는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되게 많았어요. 그때 선택해서 들은 건 시경(詩經) 수업. 성적도 꽤 잘 받았어요.
혹시 학부생 시절에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으신가요?
그때는 의대생 의료봉사 같은 것도 굉장히 많았어요. 그런데 의료봉사라는 것은 사실 다 같이 가서 약 나눠주고 끝나잖아요. 과연 그렇게 해서 병이 치료가 되느냐 이거에요. 어디 아프다 그러면 진통제 주고 끝이에요. 그거에 대한 불만이 굉장히 많았어요. 지금도 그래. 여러 병원이 무의촌 진료라는 선전으로 직원들을 데려가서 외국에 많이 나가죠.
또 그런 데 가면 인간의 추악한 점을 많이 봐요. 환자들이 와서는, 전부 공짜니까 뭐든지 많이 가져가려고 해요. 서로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공짜로 나눠주고, 저 사람은 공짜로 더 많이 받으려고 그러니까 서로 견제하는 사이가 돼요. 이런 모습들을 보고,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생각은 내가 의사가 되고, 애양원에서 일을 할 때도 이어졌어요. 우리는 무의촌을 갈 때 저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대학생 시절에 다른 동아리나 학회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미술부를 했어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거든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 미술부를 했고, 대학 들어가서도 했어요. 어렸을 때는 수채화를 그렸지만 나중엔 유화를 주로 쭉 그렸어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네요. 내가 어릴 때 일인데, 옛날에 어른들께서는 집에 놀러 오시면 아이들에게 노래 불러라, 그림 그려봐라 이러잖아요. 그때 새를 그렸더니, 큰아버지가 보고 “야, 이 새는 살아 있는 것 같구나”라고 칭찬을 하셨죠. 내가 학교를 들어가기도 전이었는데, 그걸 듣고 그림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칭찬에 힘을 얻어서 열심히 그리다 보면 또 누가 칭찬했고.
지금도 그림을 그리시나요?
지금은 안 해요. 그림을 그리려면 생각이 90%고 행동이 10%여야 하거든요. 옛날에 미켈란젤로가 교황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벽화를 부탁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교황이 그 밑에 간첩을 뒀거든요. 매일 교황에게 일지를 써서 바쳤어요. 화가를 고용하려면 돈이 비싸니까. 그런데 맨날 일지를 보면 ‘오늘도 아무 것도 안 했다’ 뿐이에요. (웃음) 오늘도 아무것도 안 했다. 교황이 막 화가 나는 거야. 하루에 얘가 얼만데!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그리지 않고 생각을 했던 거죠. 그림은 머리로 그리는 거지 손으로 그리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결혼한 다음에 한쪽 방에다가 화구를 갖다놓자고 했더니, 아내가 그리지도 않을 거면서 그걸 왜 하냐 그래요. 집이 쪼끄맸거든요. 한쪽 공간을 차지하는데다가 또 이게 깨끗하지 않아요. 유화라는 게 한 번 묻으면 지워지지도 않잖아요. 그 못된 교황처럼 나를 구박하는 거야! 그림을 그리려면 생각을 해야 하는데 시간도 없고. 그러다가 점점 더 생활에 찌들고, 애 낳고 하다보니까 어떻게 할 엄두가 안 나요. 불쌍하죠. (웃음)
선배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역사. 미술에 관심이 크셨던 것 같습니다. 미술가나 역사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셨나요?
왜 없었겠어요. 사실 나는 의과대학보다 역사학과나 중어중문학과, 이런 곳을 가고 싶었어요.
아, 그런데 생계 때문에...
어떻게 알았어? (웃음) 그때는 정말 취직이 어려웠어요. 먹고 사는 게 큰 문제였죠. 역사를 공부하고 싶다고 부모님한테 이야기를 하니까, 너는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그래. (웃음) 그런 셈도 많아요.
그런 선배님께서도 대학교에 들어오신 뒤로 진로에 대해 고민한 순간이 있으셨나요?
의과대학이라는 건 그렇게 고민을 하게 만들어놓은 곳이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기숙학원 같은 거죠. 진로 고민이라는 건 의사가 된 다음에 무슨 과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디로 취직을 할 것인가 정도. 우리 때는 졸업을 해야 되겠다, 이거 딱 하나거든요.
진로를 고민하는 애들이 가끔 있기는 했어요. 우리 동기들 중에서 의사로서 적성이 안 맞아 도중에 관둔 친구들도 한두 명 있었고. 나야 뭐, 시키면 하는 거지 적성이 어디 있어요. 나는 지금도 어딜 여행 가서든 아무거나 잘 먹어요.
본과가 끝나면 레지던트를 하기 위해 과를 선택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왜 정형외과를 선택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고민이 그때부터 시작되는 거야! (웃음) 그것도 사실 맘대로 되는 건 아니에요. 성적순이거든요.
그러면 성적에 맞춰서 가나요?
정형외과는 제일 잘해야 가요.
제일 잘 하셨네요.
그렇지. (웃음) 그런데 의과대학에서는 3학년부터 임상실습을 하거든요. 수술도 참관해야 해요. 그런데 나는 수술하는 걸 보고선 의과대학에 잘못 들어왔다고 처음 생각하게 된 거죠. 피가 너무 무서워! 이렇게 째는 거. 살을 째면 피가 나오는데 이게 너무 무서운 거죠. 그래도 어떡해요. 들어왔으니까 해야 하잖아요.
실습을 다 돌아보는데, 내과는 원래 안 째잖아요. 원래 엑스레이도 안 째죠. 그런데 그 당시엔 내과도 엑스레이 같은 걸 하려면 혈관조형술을 해야 했거든요. 혈관을 째서 관을 넣고서는 조영제를 넣고 엑스레이를 찍어요. 처음엔 내가 엑스레이를 해야겠다 싶었죠. 그런데 보니까 부분마취를 하고 카세터를 집어넣으려는데 갑자기 피가 막 터져 나와요. 그러니까 더 무서워. 그래서 엑스레이도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죠. 내과는 흉골천자라는 걸 해요. 예를 들어 백혈병에 걸린 아이의 흉골에다가 두꺼운 쇠로 된 관을 찔러서 천자를 하는데, 내 친구 하나는 그걸 보다가 기절을 했어요. 수술 받는 애가 너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니까.
저것도 못 하겠다 싶었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고. 그런데 정형외과는 그때 소아마비 환자가 많았어요. 지혈대를 묶고 하니까 째는 데 피가 안 나더라고요. 째는데 피도 안 나고, 힘줄을 이렇게 빼서 이리로 돌리고 하는 모습을 보니까 그 일이 괜찮아 보였어요. 그래서 정형외과를 갔어요. ‘어차피 할 거면, 제일 덜 피가 나는 정형외과를 해야겠다.’ 그래서 정형외과를 하게 됐어요.
지금은 피가 안 무서워요. 무서워도 자꾸 습관을 들이고, 어차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거기서 포기하면 안 돼요. 사실은 못할 게 다 어디 있겠어요. 다 사람이 하는 건데.
의과대학 졸업하시고 나서 전공의를 5년, 공중보건의를 3년 지내셨습니다.
전공의를 지내실 때 처음으로 소록도를 가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선배님께서 무엇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때는 레지던트 4년 중간에 무의촌에서 6개월을 지내야 전문의 시험을 보는 자격을 줬어요. 그런 법이 있었어, 하도 무의촌이 많았으니까요. 그때 처음으로 소록도에 발령이 됐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소록도를 갔죠.
6개월 잘 지냈어요. 너무나 신선하고, 못 보던 걸 많이 보고. 내가 원해서 간 건 아니었지만,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거죠. 소록도를 가보니까 의사의 역할이라는 게 여러 가지 있다는 걸 깨달았죠.
의사의 역할에 대한 선배님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엔 잘 먹고 잘 사는 거라고 생각했죠. 무의촌을 6개월 가야 했을 때, 사실 우리 선배들은 춘천도립병원으로 갔거든요. 그래서 나도 당연히 거기로 갈 줄 알았는데, 하루아침에 소록도로 간 거죠. 그런데 소록도에 가보니까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웃음) 그래서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거기는 해도 일찍 져요. 그때 내가 겨울에 갔거든요. 그런데 한 가지 장점은, 그렇게 춥지 않아요. 테니스도 간혹 쳤고. 겨울에 반바지 입고 쳤어요. 서울보다는 굉장히 따뜻했죠. 그리고 그림도 그렸어요. 나중에 떠날 때 조그마한 집에서 그림 전시회도 하고, 그림을 많이 나눠주기도 했어요.
무엇보다도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우리가 노벨상 받게 하자고 이야기했던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님, 소록도에 계시던 많은 수녀님들.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마음이 참 정화됐죠.
레지던트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전문의가 된 다음 공보의(공중보건의)가 됐잖아요. 내가 공보의 할 때 소록도로 다시 가겠다고 했어요. 웬만한 사람들은 서울에서 출퇴근하길 바라는데. 나는 이왕이면 3년 동안 소록도에 가 있겠다고 했어요. 그땐 내가 이미 장가를 갔죠. 애도 하나 낳고.
전공의 수련기간 때 우연히 소록도에 가셨던 일을 계기로, 공중보건의 근무도 소록도에서 지내신 거군요.
공중보건의 근무를 마친 뒤엔 어떻게 하셨나요?
내가 열심히 일을 하고 그러니까, 그때 소록도에 계시던 원장님께서 사사카와 재단의 펀드를 갖고 와서는 날 보고 인도에 가서 두달 반 동안 나환자 수술을 해보라는 거예요. 그때는 군인 신분에 해외로 나간다는 게 상당히 어려웠거든요. 그렇게 다녀오고 나니 그때부터는 우리나라에서 나환자의 재건 수술을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자신감이 선 거죠. 당시에 삼성병원, 아산병원도 처음 생겼고, 그런 데에서 교직으로 오라고도 했죠.
그런데 소록도에서 계속 지내기에는 할 일이 제한적이에요. 하지만 나는 나환자들을 떠나기가 싫었어요. 내가 아니면 누가 나환자 수술을 하겠냐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때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애양원이었어요. 일반 환자들을 보면서 나환자와 연관성이 있는 병원은 유일하게 애양원이었거든요. 굉장히 열심히 일을 하는 곳이에요. 내가 열흘 간 휴가를 얻어서 그쪽 사람들이랑 같이 지내봤어요. 그쪽 사람들은 의사를 구하기 힘들다 보니 나를 간절히 원했죠. 그래서 간절하게 바라는 데로 갔죠. 내가 나환자를 돌보지 않으면 누가 돌보겠냐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거기서 정년 하고도 3년 더, 37년 지냈어요.
그렇다면 지금 근무하고 계시는 용인 예스병원으로는 몇 년에 오셨나요?
2019년 6월 11일에 왔죠.
여기 근무는 어떠세요?
내가 애양원에서 일을 많이 할 때는 하루에 서른다섯 명도 수술하고 그랬거든요. 매일같이 그렇게 하는 게, 해야 하는 일이 된 거죠. 그 많은 환자들을 내가 치료 안 하면 그 환자들은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도 언젠가는 이 일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죠. 내가 정년이 되면 깨끗하게 관두려고 했는데, 병원에 환자들이며 병원 운영하는 사람들이며, 내가 그만두면 큰일이지 않느냐고 하기에 붙들려 있었는데, 결국 끝내긴 끝냈거든요. 37년 지낸 집을 이사하기도 쉽지 않았고.
여기 예스병원 일은, 우리 애양원에서 일하던 것보다는 훨씬 적죠. 여긴 편해요. 이렇게도 사는데, 여태까지는 괜히 뭣도 모르고 뼈 빠지게 일했구나 라는 생각도 하고요. (웃음)
지난날에 후회는 없으세요?
나는 뒤 안 돌아봐요. 혹시 교회 다녀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아브라함의 조카가 ‘롯’인데, ‘소돔’이라는 성에 살았어요. 아주 타락한 도시죠. 그래서 하나님이 소돔을 멸망시키려고 했어요. 그런데 롯이, “소돔성에 열 명의 의인이 있다면 소돔성을 멸망시키지 말아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이 알겠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암만 찾아도 다섯 명밖에 없는 거죠.
그렇게 멸망의 날이 왔거든요. 두 천사가 롯에게 찾아와 말하길, 소돔성이 유황불에 멸망할 테니까, 가족을 데리고 빨리 도망을 가라고 했어요. 그런데 도망칠 때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죠. 하지만 롯의 부인은 뒤를 돌아봐서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어요. 나는 뒤를 안 돌아봐요. 끝난 걸 돌아봐서 뭐하겠어요.
선배님께서 갖고 계신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이 병원도 사실은 인공관절을 많이 안 하는 병원이에요. 다양한 걸 하는 병원이긴 해도 그런 부분은 조금 부족하니까 내가 와서 아주 환영 받았고, 그런 대로 영역을 넓히고 있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의 인공 관절 수술을 맡죠.
내가 애양원을 떠나면서 소아마비 환자들하고 나환자들에게 제일 미안했어요. 그래서 이 병원에 부탁하기를, 한센 환자들이 겉보기에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그들이 나를 찾아올 수 있으니 양해를 바란다, 그런 이야기들을 했어요. 병원에서는 뭐든지 좋다고 그랬죠. 사실은 소아마비 수술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소아마비 환자들도 상당히 오갈 데가 없고, 자기 속마음을 알아줄 사람들이 별로 없잖아요.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일할지는 몰라도, 그런 사람들을 계속 치료하고 싶죠.
오랜 시간 선배님께서는 의사에 대한 환자의 신뢰를 강조하셨습니다. 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의사의 입장에서 환자에게 어떻게 신뢰를 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신뢰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오는 거잖아요. 환자는 자기 몸을 의사한테 맡기고, 돈을 주죠. 경제적으로도 내가 무언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의사가 삐끗해서 잘못하면 환자한텐 큰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의사는 환자에게 소위 불가역적인 손해를 끼칠 수가 있죠.
의사가 환자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의사들이 공정해야 해요. 의사가 신뢰를 못 쌓는 이유가, 우리나라 병원들이 다 상업 병원이잖아요. 돈을 벌어야 해요. 병원은 점점 호화로워지잖아요. 환자들은 옛날처럼 구질구질한 병원을 원하지 않아요. 조금 더 돈을 내더라도 편안한 곳을 원해요. 그런데 우리나라 의료보험은 굉장히 타이트하거든요. 의료보험대로 하면 병원들이 다 망해요. 예전에 아는 복지부 직원들이, 애양원을 하나의 샘플 병원으로 선전하겠다고 해서 우리가 반대를 했어요. 이건 특수한 병원이고, 직원들이 굉장히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유지되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일반 병원은 그 보험 시스템을 고려해서 비보험 상품을 많이 만들고 수익을 올리죠. 원래 수술하면 20%만 환자가 내고 80%는 의료보험공단에서 내주거든요. 그런데 20%는 너무 낮단 말이에요. 의사들이 머리가 좋으니까 보험이 적용 안 되는 부분을 자꾸 창출해내. 병원을 더 좋게 운영하기 위해 그러는 거죠. 그런데 환자들은 또 그런 걸 눈치 채잖아요. 저기 저 병원에 가면, 쓸데없는 비급여 품목을 많이 권하면서 나를 바가지를 씌우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거든요. 알고 있어요?
저는 치과 진료 때문에...
그러니까요. 첫째로 의사가 정직해야 하는데, 병원을 운영하다보면 정직해지지 않을 수 있어요. 하지만 최소한 정직하면 환자들이 금방 알거든요. 그런 신뢰를 쌓는 과정에서 수술했을 때 결과도 좋아야 할 거 아녜요. 그러려면 상당히 시간도 오래 걸리죠. 시간이 걸려도 그런 신뢰를 쌓다 보면 환자들이 다 알고 마음을 여는 거죠.
2016년 서울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너무 좋은 직장을 찾지 말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선배님께서 생각하셨던, 학생들이 바라는 ‘너무 좋은 직장’이란 무엇이었는지, 그렇다면 정말 ‘좋은 직장’이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내가 예전에는 중문과를 가고 싶었는데, 먹고 살려고 의과대학을 갔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먹고 사는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으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걸 택하라는 이야기에요. 너무 좋은 직장은 일반 사람들이 다 좋다고 하는 직장인데, 그런 곳은 경쟁이 굉장히 치열하잖아요. 하지만 일반 사람들이 그렇게는 선호를 안 해도, 내 적성에도 맞고 비전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블루 오션에서는 내가 능력을 발휘해서 부각을 드러낼 수 있죠.
아무래도 순수 학문, 예를 들어 국문이나 중문, 미학 같은 것을 해가지고서는 자기 전공 살리기가 상당히 어렵잖아요, 현실이. 그래서 그런 것들을 2지망으로 삼는데, 그것도 좋아요. 그런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꿈이 이뤄질 거예요.
선배님께서는 저희에게 피스메이커(peacemaker)가 되라고 말씀해주셨는데요.
피스메이커와 관련된 선배님의 인상 깊은 경험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피스메이커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화평케 하는 사람. 그 반대되는 말은 트러블메이커죠. 우리말로 번역하면 전염병 같은 자. 전염병이라는 건 옮기잖아요. 불평하는 사람은 불평을 주위에 옮겨요.
나는 병실 중에서 다인실을 참 좋아하거든요? 어떤 다인실이 분위기가 굉장히 좋으면, 그 병실엔 참 밝은 할머니가 있어요. 활동적이고, 운동도 하고, 또 말도 잘하고, 분위기를 화평케 해요. 그게 피스메이커야. 그래서 그 방의 사람들 모두가 운동도 잘하고 건강도 다 좋아지고 그래. 그런데 어느 방에 가면 분위기가 안 좋아요. 가만히 보면 트러블 메이커 할머니가 있어요. 자꾸 불평하고, 운동 하라고 그러면 안 하고, 그런 할머니가 있어요.
사회가 그렇잖아요. 이왕이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주위 사람을 밝게 하는 피스메이커가 되려고 노력하면 좋잖아요. 그런데 그게 공짜로 되는 건 아녜요. 피스메이커가 되려면 자기가 조금 손해를 봐야 해요. 떡 다섯 개를 하나씩 나눠주다 보면 자기 것이 없을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내가 먼저 떡을 차지하고 있으면 상대방이 불만을 느끼니까, 내가 조금 손해를 느끼더라도 주위 사람들한테 먼저 나눠줘야 해요. 사회에 선순환을 만드는 사람, 그게 피스메이커에요.
선배님께서는 모두가 독특한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자긍심의 원천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은 특별해요. 나쁜 사람이건 좋은 사람이건 이 세상에 모두 필요해요. 이 세상에 조화를 이루는 거죠. 내가 제일 감명 깊었던 것은, 가끔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이 세상이 기독교 국가가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하거든요? 그런데 중세 유럽이 기독교 국가인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를 우리가 다크 에이지(Dark age, 암흑시대)라 부르잖아요.
하나님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머리에 똑같이 비를 내리고, 똑같이 해를 비쳐요. 하나님이 능력으로 악인을 없앨 수는 있지만, 이 세상에 꼭 필요해서 그 사람들을 놔두었다는 거죠. 그 사람들하고도 조화를 이루어서 살라는 거죠. 그 사람들을 없애고 선한 사람들끼리만 살라는 게 아니에요. 누구나 하나님이 만든 독특한 인성을 가지고 있는 거고, 상대방을 부정하면 안 돼요. 자기 자신도 ‘내가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어서 이 세상에 있다’는 존재의식을 가져야 해요.
그래서 ‘저 놈은 왜 저런 사람일까’하면서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죠. 그런 판단을 하는 건 사람이 할 판단이 아니라는 거죠. 우열이라는 건 이렇게 하면 보이기도 하지만 저렇게 보면 안 보이기도 하잖아요. 그 사람 나름의 독특한 개성이 있는 거고, 그 개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해요.
선배님께서는 언제 제일 행복하다고 느끼세요?
내가 지금 서울에 있으니, 시간 있으면 박물관에 가요. 국립박물관은 돈도 안 받아요. 그래서 그런 데에서 시간 보내고. 가끔 책 보고. 내가 좋아하는 꽃 키우고. 그때가 제일 행복해요.
고등학교, 대학교에 오면서부터 많은 학생들이 다양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데요.
학생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가치나 기준으로서 강조해주실 만한 것이 있을까요?
사회가 나한테 원하는 게 뭔지를 우선 알아야죠. 이 사회에서 살아야 하니까요. 이 사회가 나한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서, 그것이 내 적성에 맞으면 유연하게 살 수 있죠. 가족, 혹은 사회가 기대하는 것과 너무 어긋나는 삶을 살면 독특한 삶을 살게 되겠죠, 옛날의 고갱처럼. 그것도 자기 이익이나 개성을 성취시키는 하나의 방법이기는 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조금 더 원활하게 살고 싶다면, 사회가 원하는 게 뭐고, 나의 특성이나 장기가 무엇인지 보고선 서로 맞춰가야죠. 그런 방향으로 자기계발을 한다면 본인도 비교적 편안하고, 사회도 자기를 나쁜 사람이라거나 이상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거예요.
하여간 내 생각엔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게 좋아요. 요새 우리 학생들은 자기의 의지나 진로가 아주 뚜렷하더라고요. 자기는 의과대학에 들어와서 어떤 것을 연구하고 싶고, 뭘 하고 싶고……. 우리 때랑은 달리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목표가 뚜렷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목표를 너무 확고하게 정해뒀다가, 그게 안 되면 좌절을 할 수 있어요. 조금 유연성이 있어야 해요. 사회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잖아요. 외골수로 잘못 빠지면 개인적으로는 불행할 수 있거든요.
우리 수학 시험 칠 때 뭐라고 해요? 어려운 문제 있으면 넘어가라고요. 어떤 친구들은 정말 못 넘어가는 애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거에 시간을 다 빼앗겨서, 시험 시간이 부족했다고 하는 친구들이 옛날에도 있었거든요. 사회라는 게 내 맘대로 되지도 않고 경우의 수도 여러 가지니까, 자기의 뜻을 버리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상황에 따라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고등학생에게 해주시고픈 말씀이 있으실까요?
요새 고등학생들이 굉장히 자아의식이 강하고, 목표가 비교적 좋은 것 같아요. 우리 때보다는 훨씬 더 나은 세상을 살고 있어요. 옛날에 우리 어렸을 때는, ‘왜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났을까’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훨씬 좋은 환경에서 지내고 계시니까, 너무 부정적으로 이 세상을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더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지금 학생들이 경쟁적으로 사는 데에 참 미안하지만, 사실 우리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경쟁 없는 세상이 어디 있어요. 우리도 중학교 때 시험 보고, 고등학교 때 시험 보고 대학교 때 시험 봤는데. 입시라는 게 많은 사람들이 조그마한 것을 얻기 위해서 경쟁하는 거잖아요. 우리나라에서 경쟁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세계화 시대에서 우리나라가 어떻게 살겠어요. 경쟁 없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고, 다만 경쟁을 어떻게 공정하게 하느냐가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고민인 거지, 이 세상에 인류가 있는 한 경쟁은 있을 거예요. 경쟁 사회에서 살아나가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의사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특별히 해주실 말씀이 있으실까요?

의사를 꿈꾸는 학생들은 어느 때나 잘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여건에 의해서 자기가 배운 것을 지키지 못하는 게 문제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여러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안 하는 게 너무 많아요. 그러면 신뢰도 떨어지고 자신도 만족하지 못해요. 그러니 본인이 배운 것을 그대로 지향하는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