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공, 나의 진로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세요. 그게 제일 행복해요!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우리에게 널리 읽히는 시 중 하나인 ‘성에꽃’은 1990년도에 태어난 작품이다.
성실하게 공부한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면 꼭 한번 이 시를 접해봤으리라.
그러나 이 시에 담긴 최두석 선배의 모습만 알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1990년도의 그분만 알고 있는 것이다.
꾸준히 시집을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활발히 이어오고 있는 최두석 시인
지난 해에는 ‘숨살이꽃’으로 다시 한 번 꽃의 향기를 세상에 뿌렸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시가 아니라 시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꽃의 시인, 최두석 선배님을 만나보자.
제가 알기로는 1980년에 등단했고 2018년 1월엔 시집 ‘숨살이꽃’을 출간하셨죠. 굉장히 긴 시간 동안 작품 활동을 해오셨는데, 이렇게 오래도록 시를 쓰는 일이 어렵진 않으신가요?
시를 쉽게 써본 적이 없어요. 젊은 시절에도 쉽게 쓰는 게 어려웠어요. 뭔가 새로운 걸 담아내야 하니까요. 시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게 쉽지 않아요. 특히 시는 자기 자신이 있어야 해요. 자신의 삶으로 받치지 않고 머리로만 쓴 시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자신의 삶이 받쳐줘야 시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쉽게 쓴 적이 드물어요. 나이가 들면 체력적으로도 더 힘들어지잖아요.(웃음) 나는 이제 직접 발로 뛰고 답사하며 쓰는 시 쓰기 방식을 취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젊은 날보다 더 힘들어졌죠. 또 젊은 친구들은 자기 감각 자체가 새롭지만, 나이 들면 그게 어려워진다고 봐야죠. 그래도 계속 시를 쓸 거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답사도 계속할 거예요.
시가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해야 하고, 그 속에서도 새로운 걸 발견하기 위해 답사를 다닌다는 건가요?
그렇죠. 나의 시 쓰기는 낭만주의적인 시작(時作)과는 많이 달라요.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리얼리티라고 해야 할까. 실감을 중요하게 여겨요. 실제로 삶과의 교류, 사람과의 교류가 시와 밀접하지 못하면 실감을 확보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발로 뛰면서 실제로 소재가 되는 인물이나 사물과의 접촉면적을 넓히려고 노력하고 있죠.
시 쓰는 일이 선배님께는 어떤 의미인가요?
세상에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고 그러잖아요. 나는 시를 쓰는 순간이 가장 맥박이 크게 뛴다고 해야 할까나?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가장 강하게 주는 것이 시 쓰는 일이기 때문에 시를 써요. 삶의 의미 찾기인 거죠.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입시에서 자유롭지 못했어요. 학교 다니는데 숨 쉴 구멍이 필요했죠. 그게 저한텐 시를 읽는 거였어요. 시 읽기에 재미를 붙였던 것이죠. 도서관에서 쉽게 빌려볼 수 있는 게 시집이었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때부터 시집을 많이 빌려 읽었어요. 언어 감각의 흥미라고나 할까요. 말을 그렇게도 쓸 수 있구나 하는 게 재미있잖아요. 거기서 재미를 느끼다 보니까 저절로 쓰기도 한 거죠. 언제부터 시를 써야겠다고 결심한 건 없는데, 창작하기 시작한 건 중학교 때부터였어요. 중고등학교 때 나름대로 열심히 시를 썼죠.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교수님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좋은 시를 쓰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그것은 생업이 안 되잖아요. 그렇다면 생업으로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하다가 그게 국어교사가 아닐까하고 생각했어요. 그 일을 하면서 시를 쓰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국어교육과를 갔죠.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시절만 해도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면 저절로 국어교사가 됐어요. 지금과는 사정이 좀 달랐죠.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빈곤했어요. 그래서 시 쓰기로 생업을 꾸려갈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았죠.
학창시절부터 시를 비롯해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는데 그만큼 독서량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문학 소년이었으니까 이것저것 시든 소설이든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번역서도 가리지 않았어요. 제가 다니던 학교가 연원이 오래돼서 도서관에 책이 많았어요. 이것저것 빌려서 읽을 수 있었죠. 다른 장르에는 별 관심 없었어요. 문학 위주로 읽었죠. 그리고 고등학교 때 소설도 써보긴 했어요. 그런데 내 체질이랑은 안 맞는 것 같았죠. 개인적으로 말 많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김현 선생님과 구인환 선생님께 즐겁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대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지금도 ‘대학문학상’이 있지요? 내가 서울대에 입학한 해에 바로 ‘대학문학상’에 당선이 됐어요. 그래서 제가 대학 시절에 어떻게 하면 본격적으로 시를 쓸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학교에 다녔어요. 그때 고마운 분이 불어불문과에서 비평을 하셨던 김현 선생님이세요. 그 분이 돌아가신 지는 꽤 됐어요. 김현 선생님이 문학과지성이라는 잡지의 편집 동인이셨죠. 김현 선생님께서 내 습작 시를 자주 읽어주셨어요. 그게 나한텐 대학 시절에 아주 도움이 되는 일이었죠. 내가 대학 졸업할 때 즈음 <심상>에서 등단했는데, 그게 선생님께서 내 시를 <심상>에 갖다줘버린 거였어요. 나는 등단 같은 것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등단하게 됐죠. 국어교육과에 계셨던 구인환 선생님도, 이분이 소설 전공이신데, 내가 연구실에서 밤에도 계속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셨어요. 연구실에 있는 책도 마음대로 빼서 봐도 됐죠. 덕분에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 대학 시절의 좀 행복한 점이었다고나 할까요. 또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거든요. 학교에 좋은 강의가 많아서 학부 시절에 재미있게 수강하고, 공부하는 데에 많이 도움이 되었어요.
고등학교 때 습작을 하시면서 동아리 활동도 하셨나요?
우리 학교에 유서 깊은 고등학교 문학동아리가 있었어요. 내 동기만 해도 ‘사평역에서’를 쓴 곽재구 시인이 같은 반이었죠. 황지우 시인도 같은 문학 동아리 선배였어요. 전통이 있었다고나 할까. 서로 작업한 걸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게 있는데…. 고등학교 때 열심히 잘 쓰던 사람 중에 계속 글을 쓴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는 것이었죠.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신 후에 대학원은 국문학과로 가셨거든요. 학과를 바꾸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학문으로서 국어교육학에 대한 관심보다 국어국문학에 더 관심이 있었어요. 특히 우리나라의 현대시에 대해 더 깊이 공부를 하고 싶어서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을 갔던 것이죠. 현대시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가 국어교육과에서 배우는 것이고 한국현대시 자체에 대한 탐구, 이건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하는 것이잖아요. 결국 공부하고 싶은 데로 간 것이죠. 물론 국어교사를 7년 동안 하긴 했어요. 대학을 졸업한 후였죠. 그런데 그 시절이 아주 안 좋았잖아요. 내가 글을 쓰면 내가 고등학교 교사라는 이유로 자꾸 시비를 걸어요. 그래서 내가 더 자유롭게 글을 쓰려면 고등학교에 매여 있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죠. 처음에는 문예창작학과 교수가 아니라 국어국문학과 교수였어요. 강릉대학교에서 현대시를 가르쳤어요. 그런데 국어국문학과는 계속 논문을 써야 하잖아요. 나는 시 창작자고. 그래서 시 창작자로서 더 적절한 학과를 생각하다가 문예창작학과로 옮겼어요. 그러니까 처음엔 시를 쓰는 데에 제일 적절한 생업이 무엇인지를 찾다가 국어교사의 대체가 교수였던 거죠. 그런데 그 시절만 해도 문예창작학과가 별로 없었어요. 그러다가 문예창작학과가 대학교에 좀 생기니까 고민을 했죠. 연구와 창작은 초기엔 같이 해도 괜찮지만 결국엔 나뉘게 돼있어요. 연구자로서의, 혹은 창작자로서의 생활과 감성이 다르거든요. 그래서 정말 창작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문예창작학과로 옮겼던 거예요.
많은 학생이 ‘성에꽃’을 읽으며 교수님을 이름을 그 시로 처음 만나게 됩니다. 저도 그랬고요.
고등학생들에게 아주 미안해요. 그거 때문에 문제풀이 한다고 골머리를 앓잖아요. 얼마나 미안할 노릇이에요. 시라는 게 아무 부담 없이 즐기면 더 좋은데, 문제풀이 대상이 되어버렸으니 미안하게 생각해요.
‘성에꽃’은 80년대 중반에 쓴 시에요. 그러니까 그때는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과 1987년 6월항쟁 중간쯤이죠. 그때 반독재민주화 열기가 엄청났던 때죠. 당시 많은 사람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붙잡혀갔어요. 그렇게 붙잡혀간 사람들에게 국가보안법이 적용됐어요. 문제는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간 사람은 자기 부모와 같은 직계가족이 아니면 면회를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라는 구절이 나온 겁니다. 또 당시에 <민중교육>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는데 그 잡지로 동인 활동을 같이 했던 동료 시인들도 많이 붙잡혀갔어요. 지금은 버스에 난방시설이 잘 되어있어서 버스 유리에 성에가 낄 일이 없죠. 그런데 예전에는 그런 게 잘 안 됐기 때문에 새벽에 버스를 타면 유리에 성에가 끼어 있었어요. 성에꽃은 유리에 낀 성에와 꽃을 결합한 거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이라고 할까요. 그 어려운 시절에 자기의 희망, 바람직한 사회를 이룩하려는 사람들이 뿜어낸 더운 숨결. 버스 속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나면 그 숨결이 남았을 텐데, 그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담아 성에꽃으로 지었던 거죠. 지금은 좀 많이 안타깝죠. 그때는 힘들었어도 온몸을 던지며 살던 사람들이 많았죠.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너무나 각박해지고 찌글찌글해졌잖아요. 일자리도 구하기도 힘들고…. 사람들이 무언가 보람을 찾을 자리가 없고 꿈이 위축됐어요. 옛날 그 시절은 꿈이 막 피어나고 있었어요. 역사의 상승기였죠.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젊은 친구들이 너무나 힘들고, 그게 안타까워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세요.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입니다학생들이 시를 더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을 방법이 있을까요?
시집을 읽으며 좋은 시를 찾아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것을 찾아 읽는 일을 즐기면 금방 시에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낯선 시를 만나도 잘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을 거예요. 시를 즐기면서 읽어두면 훨씬 이해가 깊어지거든요. 그러니까 시를 읽을 때 단지 시험문제에 매여서 끌려 다니지 말고, 자신을 좀 바꾸면 시와 함께하는 게 훨씬 더 즐거워질 거예요. 공자님 말씀도 있잖아요.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이 말이 시에도 적용되는 것 같아요.
시를 쓰려고 하는, 시를 쓰고 있는 학생들에게도 조언해주실 수 있을까요?
자기가 좋아서 쓰면 되는 거예요. 그게 제일 우선이에요. 시를 통해 무얼 이룩하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좋아해서 저절로 쓰이면 쓰는 거예요. 시 쓰기의 길은 굉장히 험해요. 만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요. 시는 다른 일을 하면서 쓰는 것인데, 다른 일에 매여 버리면 시를 쓸 수 없어요. 시 쓰기는 자기가 좋아서, 즐기면서 하는 것이니까 그 마음을 계속 유지하는 상태에서 썼으면 좋겠어요. 시를 써서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거죠.
마지막으로 고등학생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찾았으면 좋겠어요. 다른 누군가가 하라고 하는 것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공부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스스로가 주인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길게 가고 행복하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