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공, 나의 진로
세상 참 모를 일이에요
‘알면 사랑한다.’라는 좌우명으로 유명하신 최재천 교수님.
서울대학교 교수, 자연사박물관장, 대학원에코과학부장을 거쳐
현재는 생명다양성재단 대표이자 이화여대 석좌교수직을 맡고 있다.
엄청난 저작 활동을 하고 있으며 칼럼도 지속적으로 쓰고 있다.
그래서 생각했다. 선배님께서 마음속에 품고 계신 ‘생물학 열망’은 얼마나 커다란 것일까!
그 이야기가 궁금해서 밤잠을 설쳤다.
인터뷰 날. 퀭한 눈으로 물었다.
“선배님께서 동물학과 진학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선배님께서 말씀하셨다.
“사실 나는 생물학을 하려던 사람이 아니에요.”
…… 네? 선배님?
‘알면 사랑한다.’라는 말씀을 사람들이 많이 기억합니다. 이 문장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정말 우연히 시작한 말입니다. 파나마에 스미소니언 열대연구소에 있었을 때 일이에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전갈 한 마리가 바닥에 기어 다니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놈이 어느 날부턴가 내가 흘린 음식을 먹더라고요. 그래서 음식을 계속 줬는데, 나중에는 겁이 없어져서 상 위까지 기어왔어요. 열대 정글에서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에겐 이런 일이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에요. 매일 뱀 같은 동물을 식구처럼 여기는 사람들이니까…. 하루는 여느 때처럼 포크에 밥을 찍어서 전갈한테 주고 있는데, 어떤 여학생 한 명이 괴물영화의 한 장면처럼 벽으로 달려가더니 소리치고 난리가 난 겁니다. 그날 오전 연구소에 도착한 미국 여학생이었는데, 전갈을 보고 경악을 한 거죠. 그런데 그 학생이 날 보면서 “무식한 동양놈이 예의가 없어서 저런 짓을 한다.”라고 욕을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 전갈을 밖으로 내보내면서… 참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긴 한데 “야, 너 당분간 쟤 있는 동안엔 여기로 들어오면 안 된다. 쟤가 너 밟아 죽일지도 몰라. 이제부터는 내가 밥 먹고 난 다음 남은 거 여기로 가지고 와서 줄게.”라고 전갈한테 떠들었어요. 그런데 진짜로 다음날부터 전갈이 안 보이더라고요. 정말 그 학생이 어디서 걔를 밟아 죽였나 싶어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았죠. 그러던 어느 날 산에 올라갔다가 연구소로 내려왔는데 그 학생이 식당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뭔가를 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속으로 ‘거참, 별 짓을 다 하네….’하며 지나가려는데, 이 친구가 내 이름을 막 부르더군요. 내 영어 이름이 제이인데, “제이! 제이! 이리 와!” 그래서 가봤더니 얘가 전갈한테 뭘 먹이고 있더라고요. 작은 꼬챙이에 고깃덩어리를 찍어서 전갈한테 대고 있더라고요. ‘아이고!’ 그 장면을 보고 난 폭발을 해버린 거죠. “언제는 나보고 무식하다고 뭐라고 해놓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라고 그랬는데, 얘가 자꾸 뭘 보라고 말합디다. 그 순간 전갈이 새끼를 업고 있는 걸 봤죠. 전갈은 새끼를 업어서 키우거든요. 나중에 새끼가 일고여덟 마리까지 되면 자기 몸만큼 커버린 새끼들을 업고 다니는 것이죠. 이 친구가 “이 전갈이 작은 새끼들을 오그랑오그랑 업고 있는데, 모성애가 너무 지극하지 않냐?”라고 말하면서 정말 사랑스럽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꼬챙이를 조금 더 긴 걸 가져다줬어요. “지금 너는 전갈의 사정거리 안에 있다. 손 물리면 큰일 난다.”라고 말해줬죠. 그 학생을 보면서 느낀 게 있어요. 전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는 비명을 질렀지만 전갈이 어떤 동물인지 알고 나니까 비로소 두려운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을. 우리가 서로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구나. 충분히 알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했죠. 그래서 환경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하게 되었죠. 자연에 대해서 더욱 많이 알수록 그 자연을 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환경보호 하자고 크게 떠들 이유가 없어요.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더욱 많이 알기만 하면 저절로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해요. 모든 것의 출발점은 결국 앎이다. 그런 것이죠.
동물행동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있을 때는 동물행동학을 전공했어요. 제가 이화여자대학교에 석좌교수로 올 때 교수를 셋 뽑았는데, 한 분이 동물행동학을 가르치고 싶다고 하셔서 양보했어요. 지금은 가르치고 있지 않아요. 동물행동학은 재미있는 학문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물행동학을 있으나 마나 한 학문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좀 섭섭하죠. 실제로 그런 학문이 절대 아니니까요. 21세기 자연과학의 꽃은 뇌과학이라고 하잖아요. 뇌를 연구하려면 인간의 뇌를 직접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게 수월하지 않으니까 다른 동물들을 관찰하면서 비교연구도 많이 해야 해요. 동물을 연구하면 인간이 보인다는 것이죠. 사실 외국에서 동물행동학은 정말 중요한 학문인데 국내에서는 대접을 좀 못 받지요. 제일 중요한 것은 무지무지 재미있다는 겁니다.(웃음)
동물학과에 진학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좀 쑥스러운데, 사실 나는 처음부터 생물학을 하려던 사람이 아니었어요. 고등학교 때 서울대학교 의예과를 지망했다가 2년 연속 떨어졌거든요. 그런데 우리 때는 ‘제2지망’이라는 참 이상한 제도가 있었어요. 원서에 자기가 원하는 과를 적을 수 있는 칸이 하나 있고 그 옆에 2지망이라는 이름의 칸이 하나 더 있었어요. 만약에 내가 원하는 과에서 떨어지면 2지망에 적힌 학과로 나를 한 번만 더 고려해달라는 거였죠. 모든 대학에 다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서울대학교에는 분명히 있었어요. 난 그동안에 건방져서 2지망을 써낸 기억이 안 나요. 재수했는데도 성적이 안 좋아서 삼수하겠다고 씩씩거리고 있을 때 즈음 친구가 오더니 나보고 서울대학교에 붙었다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떨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친구가 내 이름이 동물학과 합격자 명단에 붙어있다는 거예요. 나는 그게 동명이인일 것이라 생각해서 친구한테 수험번호를 불러줬더니 내 번호라고 말해주더군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학교에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 봤더니 제2지망으로 서울대학교에 붙은 거였어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니 요즘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원서를 낼 때는 자신의 출신 고등학교에 가서 내게 되어있었어요. 그런데 고3 담임 선생님께서 내 원서에 제2지망을 동물학과로 적었던 것이었어요. 담임 선생님께 왜 그러셨냐고 나중에 따져 물었죠.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야, 의예과도 해부하고 동물학과도 해부해. 둘이 비슷해. 그래서 썼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담임 선생님은 국어를 가르치는 분이었어요. 동물학과가 뭐 하는 곳인지는 잘 모르셨을 것 같고.(웃음) 그런데 아버지께서도 삼수는 절대 안 된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이 동물학과(현 생명과학부)들어왔어요. 별로 좋지 않았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동물행동학의 학문적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안타까워요학부 시절에 재밌었던 일화가 있다면?
소개팅이나 미팅을 나가면 여학생이랑 마주 앉아서 자기소개부터 하잖아요. 보통 ‘무슨 과에요?’가 첫 질문이 많았는데 내가 동물학과라고 대답하면 집에 자꾸 쥐가 나타난다는 둥 바퀴벌레는 어떻게 없애야 하냐는 둥 … 이런 말만 들으니 미팅이나 소개팅 같은 자리에 별로 나가고 싶지 않았어요. 한번은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소개팅 자리에서 만났는데 그때도 무슨 과냐고 그러더라고요. 제가 우물거리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동물학과요….” 이랬더니 갑자기 그 학생이 괴테의 작품세계가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를 시작하더라고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가만히 따져보니까 이 여학생은 내가 동물학과라고 이야기한 걸 ‘독문학과’로 들었구나 싶은 거예요.(웃음) 물론 나는 평소에 헤세를 좋아했으니까 그 이야기를 나누면서 좋긴 했어요. 그렇게 헤어졌는데 요즘 식으로 하면 전화번호를 따야 하는 거잖아요. 애프터를 신청해야 하는데 그럴 용기가 없더라고요. 소개팅을 주선한 친구가 수업 시간에 옆에 들러붙더니 “야, 걔가 너 또 만나고 싶다던데? 더 만나봐.”라고 말하기에 내가 싫다고 하니 친구가 왜 그렇게 피하냐고 물었어요. “내가 나가면 독문학과가 아니라 동물학과라고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하잖아. 나는 못 한다….” 가슴 아픈 일이었죠.
동아리 활동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3학년 때 이상하게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생겨서 무척 열심히 학교에 다녔어요. 우선 떠오르는 게 사진 동아리 활동이에요.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각 단과대학에 따로 있었던 사진 동아리를 통합하는 과정에 제가 참여했거든요. 그런데 동아리 회의가 너무 지지부진한 거에요. 사실 나는 사진을 잘 찍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사진을 꽤 좋아하는 친한 친구가 나를 자꾸 동아리에 데리고 가서 하는 수 없이 들어간 동아리였거든요. 그래서 회의도 그냥 건성으로 참여하는 편이었는데 그날따라 회의가 너무 지루하고 답답해서 못 봐주겠더라고요. 그래서 회의하던 중 벌떡 일어나서 나오는데 친구가 어디 가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이제 동아리 안 할래.”라고 말하고 그냥 집으로 와버렸어요. 집에 도착하고 밤 열 시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던 때에요. 친구들한테서 갑자기 전화가 온 거에요. 근처인데 잠깐 나오라고 와서 소주 한 잔만 하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을 보러 갔더니 얘들이 나보고 “재천아 네가 동아리 회장이 되었단다.”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따졌죠. 알고 보니 얘들이 내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간 후 기회다 싶어 날 뽑아버린 것이죠. 이놈들이 날 물 먹이려고…. 그래서 당시 제가 대표를 맡아 만들었던 사진 동아리가 바로 '영상'이에요. 그렇게 3학년 때는 동아리 회장을 한 서너 개 정도 했던 걸로 기억해요.
그렇다면 언제 학자로 계속 공부하고자 마음 먹으셨나요?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조지 에드먼즈라는 유타대학 교수님이 한국에 찾아오셨어요. 하루살이를 연구하시는 분이셨거든요. 요즘에야 우리나라가 외국인 천지지만 당시에는 외국인을 본다는 게 굉장히 드문 일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있는 실험실 문을 누가 똑똑똑 하고 두드리더니 백발의 할아버지가 들어온 거예요. 다들 완전히 놀라 자빠졌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그 교수님이 나를 찾는 거예요. 알고 보니 김계중 교수님이라고, 미국 펜스테이트(펜실베니아주립대)에 곤충학과 교수님이 계신데 그 분이 나를 현장 조수로 조지 에드먼즈 교수님한테 소개했던 것이죠. 김계중 교수님께서는 그 전 해에 서울대학교에 계셨는데 영어로 강의를 하셨어요. 당시에 서울대학교에는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영어로 강의를 하신다고 하니까 내가 다른 수업은 다 빼먹어도 그 수업은 꼭 들어갔어요. 나는 인문계 성향의 학생이니까 언어에는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그 수업은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한 거예요. 가끔 건방지게 질문도 했어요. 그런데 그 교수님 눈에는 내가 가장 훌륭한 학생으로 기억된 거예요. 나보고 유학을 오라고 여러 번 권하기도 했어요. 당시에는 내 까짓 게 무슨 유학인가 싶었어요. 아무튼, 그래서 현장 조수로 나를 소개해 주셨나 봐요. 결국 조지 에드먼즈 교수의 조수가 돼서 한 주 동안 전국의 개울물을 뒤지러 다녔어요. 하루살이가 수서곤충(바다, 호수, 하천 등의 물속에서 사는 곤충)이니까요. 그런데 그분이 하는 일이 하필이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인 거예요. 내 고향이 강릉이어서 어려서부터 방학 때마다 시골집에 가면 개울물에 들어가서 물고기를 잡고, 논병아리 둥지도 뒤지고 그렇게 노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거든요. 그런데 내 눈앞에 있는 이 영감님이 그 나이에 여전히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처음에는 어떻게 저렇게 놀아도 잘 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교수님이 보기엔 그저 놀기만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놀기만 하면서 잘 살 수 있냐는 말씀이시군요?
조수로 일하던 마지막 날에 교수님이 호텔에서 내게 맥주를 한 잔 사주셨어요. 그때 내가 짧은 영어로 꼬치꼬치 캐물었어요. 어떻게 당신은 학자인데도 그렇게 놀고먹을 수 있냐는 식의 질문이었어요. 우리 학과 교수님들은 죄다 하얀 가운을 입고 실험실에서 실험하고 교실에서 강의하면서 지내시거든요. 그런데 이 영감님은 우리나라에 와선 신발도 벗지 않고 개울물에 첨벙거리고 있잖아요. 나는 그런 교수를 본 적이 없단 말이에요. 교수는 지극히 근엄한 사람인 줄 알았던 것이죠. 그런데 이 사람은 교수라는데 한 주 내내 나랑 개울물 첨벙거린 게 전부란 말이에요. 저러고도 밥을 먹고 살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밥을 먹어도 너무 잘 먹고 사는 거예요. 플로리다에 별장도 있다고 이야기 들었죠. 게다가 미모의 사모님과 살고 계시고, 유타대학을 스키 타고 다니시고… 또 우리나라가 교수님이 여행한 102번째 나라라고 하셨죠. 세계를 일주하고 다니신다는 걸 알았죠. 내 어렸을 때 꿈이 세계일주하는 거였거든요. 지도 펴고 동그라미 치고 선 긋고 다음에는 여기에 가고 저기에 가야지 그랬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이 영감님이 개울물에 첨벙거리면서 세계 일주를 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잘 믿기지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캐물었더니 그 교수님이 일주일 내내 조수를 열심히 잘 해놓고 어떻게 질문하는 건 이 모양인가 싶었나 봐요. 이 자식이 아무것도 모르는 애구나라고 생각하셨는지 내게 차근차근 뭔가를 설명해주시더라고요.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종이 한 장을 꺼내시고는 말씀하셨어요. “네가 미국을 오려면 토플이라는 영어시험을 봐야 한단다. GRE도 봐야 한다. 그러고는 네가 가고 싶은 대학에 지도교수로 모시고 싶은 교수님들께 편지를 보내야 한다. 내가 이런 연구를 하고 싶은 누구인데, 저를 학생으로 받아달라고. 그래서 호응이 오면 그때 지원서를 내면 되는 거다.” 그러더니 종이에 일, 하버드(1. Harvard)라고 쓰시곤 옆에 괄호치고 이오 윌슨(E. O. Wilson)이라고 적어주시더라고요. 쓰면서 나를 힐끗 보더니 “내가 지금 너보고 여기를 꼭 가라는 게 아니라, 좋은 대학교 순서를 써주려고 그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9번 유타까지 쓰시더라고요. 그날부터 진짜 공부했어요. 나한테는 비로소 목표가 생긴 거죠. 놀고먹으려면 일단 미국 유학을 가야 하는구나. 그러면 저 할아버지처럼 평생을 개울물 첨벙거리면서 살 수 있겠구나 생각했죠.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미국에 갔어요. 그곳에서 자연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게 정말 좋은 거예요. 이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공부도 있는데 그동안 나는 왜 그렇게 재미없는 공부만 했나 싶었죠. 덕분에 지금은 어쩌다 내가 괜찮은 교수인 척하고 살고 있는데, 사실 나는 진짜 특별한 동기가 있다거나, 내 마음대로 기획을 잘 했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죠. 그런 일이 나한테 벌어진 게 정말 행운이었어요.
앞서도 말씀해 주셨는데 자연계열이 아니라 인문계열 성향이라고 하셨어요.
사실 따져보면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문청(文靑, 문학청년의 준말)이라고 생각하고 살았거든요. 그런데 내가 우리나라의 이상한 문·이과 분리 제도 때문에 이과로 편성되었어요. 내가 문과로 가겠다고 그랬는데도 학교에서 원서를 끝까지 안 써주니까 할 수 없이 이과로 가서 고생을 많이 했죠. 그래도 뒤늦게 이과치고는 조금은 문과 냄새가 나는 공부를 하게 됐어요. 동물행동학, 생태학 같은 분야도 자연과학이기는 하지만 논문을 쓰는 방식만 해도 다른 분야랑은 조금 다르거든요. 예를 들어 화학을 전공하는 분들은 논문이 거의 비슷해요. 정해진 방식이 있어요. 신물질을 개발했다 그러면 지난번에 개발했던 그 물질 대신 이걸 집어넣으면 신물질이 된다는 일정한 틀이 있는 것이죠. 그 분야를 공부하시는 분들의 경우에는 언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까치 논문을 원숭이 논문으로 바꿔치기할 수가 없어요. 둘이 매우 다르니까. 모든 게 다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논문들이기 때문에 이과지만 언어가 굉장히 중요한 분야에요. 그러다 보니 내가 간신히 살아남은 것이죠. 어떻게 보면 나는 과학자로 살아오긴 했지만 경계선 사이에서 한 발은 인문학에 두고 질질 끌면서 지내왔다고 할 수 있겠죠.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번역하면서 그 개념을 국내에 알렸는데 책을 번역한 계기도 위와 같은 맥락이군요.
윌슨 선생님의 컨실리언스(Consilience), 통섭이라는 책은 98년에 나왔어요. 윌슨 선생님께서는 내 지도교수셨지만 일 년에 몇 번밖에 못 봤어요. 이 교수님도 지금의 나처럼 어느 날 보면 책이 떡하니 나와 있었어요. 책을 쓰는 중인지도 몰랐는데 말이죠. 뉴욕타임스 북 섹션에 윌슨 선생님의 책이 새로 나왔다고 하면 그제야 그 사실을 접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책은 그렇다 치더라도 ‘통섭’을 보니까 내 삶과도 상당히 비슷한 거예요. 윌슨 선생님이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는 줄은 몰랐어요. 책을 읽으면서 특별한 감동이 나에겐 있었죠. 어떻게 보면 내가 언젠가는 쓰고 싶었던 책이라는 느낌도 있고. 또 내가 제자인데 선생님 책을 한 권도 번역한 적이 없어서 어디 한번 번역해 보자라고 생각한 것이었어요. 통섭은 결국 그런 겁니다. 옛날에는 나처럼 학문과 학문 사이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별로 환영받지 못했어요. 그동안은 한 우물만을 파는 것이 학문이고 학자였던 것이죠. 윌슨 선생님께서 그 책을 98년에, 새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쓰셨잖아요. 19세기와 20세기에 했던 과학적인 접근방식이나 학문적 구분 같은 것이 앞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걸 설파하신 거죠. ‘이제는 학문이 만나야 한다. 그동안 학문을 쪼개던 과정이 21세기에 들어와선 학문을 통합하는 과정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여러 학문이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는 매우 타당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이제는 나와 같은 사람도 필요한 시대가 되나보다 하는 느낌도 있었어요. 그래서 정말 열심히 번역했어요. 그런데 이게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는데, 예상치도 못하게 상당한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킨 거죠. 지금은 통섭이라는 말이 거의 일상어처럼 쓰이고 있잖아요.
통섭은 과거보다 현재에 그리고 현재보다 미래에 더욱 중요한 가치입니다오랫동안 문·이과 통합을 주장하신 걸로 아는데 실제로 2015 개정 교육과정부터 고등학교 문·이과 계열 구분이 없어졌어요. 계열 구분을 넘어선 융합형 인재를 육성하는 시대를 준비하는 교육을 시작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까요?
사실은 내가 올해 초가을 즈음에, 문·이과 통합하지 말고 다시 구분하던 때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했어요. 통합을 시키니까 학생 부담이 커지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학생하고 학부모가 불만이 많겠죠. 그러면 이 부담을 어떻게 줄여야 할까요. 결국은 수학하고 과학을 쉽게 해주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하면 실제로 이공계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이 옛날 문·이과 시대의 학생들보다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대학에 들어오게 되는 문제도 생기니 내가 돌아가자고 말했던 거예요. 이렇게 할 거면 하지 말자고 했죠. 문·이과 통합을 주장했던 건 정확히 이런 이야기였어요. 지금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야단법석이잖아요. 어느 한 분야만 파면 무엇인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거든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키워드가 커넥티비티(Connectivity) 즉 연결성이에요. 우리가 개발한 그 많은 기술이 컴퓨터로 다 연결되는 시대에요. 예전 같으면 한 분야만 하고도 어느 정도 살아남았겠지만,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나고 있어요. 다양한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소양이 갖추어져 있어야죠. 지금은 모든 것이 협업으로 이루어지는 시대니까 그런 거예요.
개인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 보면 우리 할아버지 세대의 기대 수명은 60세 근처였어요. 이 세대는 평생 한 가지 일만 하고도 살았어요. 그런데 현재 청년 세대의 경우 거의 100세까지 살 텐데 60세 즈음에 은퇴하고 40년을 놀아야 하나? 절대 그렇지 않거든요. 95세 정도까지 모두가 일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로 가고 있어요. 예를 들어 누군가가 화학공학을 했다고 쳐도 그 사람이 95세까지 화학공학 분야 전문가로 산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혼자 화학 공장을 차리지 못하면 치킨집을 내거나 뭐 다른 것을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미래학자들의 예측에 의하면 지금 젊은 세대가 직업을 대여섯 가지 내지는 일고여덟 가지를 전전하게 될 거라고 해요. 나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학사학위를 평생 한 일고여덟 개를 소지해야 한다고 주장해요. 지금 관악 캠퍼스를 4년 다니듯 학사학위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지금은 마이크로 디그리(Micro Degree)도 있고, 앞으로는 인터넷으로 강의를 들으며 취득할 수 있는 학위의 종류가 다양해질 테니까 공부해서 일을 구하고, 다시 일하면서 공부하는 게 앞으로의 인생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내 용어로 이야기하면 통섭형 인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요즘 융합형 인재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개인적으로 융합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 개인이 여러 분야를 융합해서 완벽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건 엄청나게 힘든 일이에요. 그런데 통섭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소통하면 가능한 거니까. 그게 바로 우리가 갈 길이에요. 통섭형 인재가 되기 위해선 다른 분야의 사람이랑 의사소통이나 협업이 가능할 정도의 학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젠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죠.
나는 대학을 한 두 해 더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은 자기 전공 외에 폭넓은 공부를 미리 해두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그렇게 하는 게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하는데, 대학에 있을 때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충분히 할 수 있잖아요. 굳이 복수전공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일정 수준의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공부를 해두면 그것 덕분에라도 그쪽 분야로 옮아갈 수 있을 거예요.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다음에 40대쯤 되어선 엄두가 나지 않을 거예요. 조금이라도 내 지식의 영토를 넓혀두는 게 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동물행동학 백과사전의 총괄 편집장을 맡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2019년 2월에 동물행동학 백과사전(Encyclopedia of Animal Behavior) 개정판이 나옵니다. 원래 2010년에 처음 나왔어요. 그때 각 섹션을 담당하는 에디터가 17명인데 나도 한 명으로 선임되었어요. 그런데 이 에디터가 저를 제외하면 전부 백인이거든요. 동양인이 딱 한 명 껴있는 것이죠. 사실 동물행동학의 지도에 대한민국은 없어요. 일본은 동물행동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대충 잡아 봐도 오륙 백 명은 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나하고 내 제자들 정도니까 존재감이 없는 나라에요. 그러니 일본사람들이 보면 참 섭섭했을 것 같네요. 그런데 개정판을 만들면서 원래 있던 총괄 편집장 두 분이 그만두시고 이 자리를 이어 맡을 사람이 필요했어요.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 사람들이 후임자로 저를 지목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한테 연락이 왔죠. 나는 “당신들 생각해 봐라. 나는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니다. 나는 못 한다.” 그렇게 의사를 전달했지만 한 달 정도 집요하게 꼬드기더라고요. 그래서 수락을 했죠. 그런데 그냥 되는 게 아니래요. 의결을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외부 심사위원이 7명이 있다고 해서 또 두 달 정도를 기다렸어요. 마침내 일곱 명의 평가 결과가 익명으로 왔는데 너무 웃긴 거예요. 일곱 명 중에 세 명이 똑같은 이야기를 썼어요. 우리 중에 다양한 동물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아는 사람이 없다는 내용이었죠.
동물행동학 백과사전의 총괄 편집장이 된 것은 어쩌면 제자들이 가져다 준 영예입니다사실 사연이 있어요. 옛날에 제가 서울대학교 94년도에 돌아왔는데 당시 연구비가 없었죠. 그런데 학생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생물학을 하겠다는 학생 대부분은 분자생물학이나 생명과학을 원합니다. 그런데 열 명 중 한 명꼴 혹은 백 명 중의 한 명꼴로 밖에 나가서 동물을 쫓아다니거나 산림학을 하겠다고 산꼭대기에 오르는 학생이 있는 거죠. 그런 학생들이 찾아갈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 시기에 내가 나타나니까 나한테 모여들기 시작한 거였죠. 누구는 평생 사슴벌레를 키웠다고 하고 누구는 침팬지를 연구하고 싶다고 하고 돌고래나 기린을 연구하고 싶다고 내게로 모이기 시작하더군요. 처음에는 “내가 미안하다. 나는 그런 걸 할 능력이 없다. 그냥 개미나 하자.”라고 말했죠. 그렇게 일 년이 지난 다음 해에 혼자 한참 고민을 했어요. 이렇게 하다가는 내가 동물행동학이라는 분야를 우리나라에 제대로 뿌리내리게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단호히 결단을 내렸어요. 내 연구를 접기로 했죠. ‘학생들이 하고 싶은 연구를 도와주자. 그러다 보면 학생 하나하나가 학자로 성장하고 우리나라에 동물행동학이 뿌리내리게 되겠지.’라고 생각했죠. 어떻게 보면 굉장히 숭고한 생각을 한 것이고,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판단이기도 했어요. 그렇게 하니 우리 연구실에서 연구한 동물이 열 몇 가지가 돼요. 너무 힘들었어요. 학생 한 명은 자기 것만 하면 되지만, 나는 모든 학생을 지도해야 하고 논문도 다 읽어야 하고… 그러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내 논문 목록을 보면 내가 봐도 웃겨요. 귀뚜라미 논문 몇 편, 까치 논문 몇 편 이런 식이에요. 누가 보면 ‘이놈은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라는 생각을 할 거예요. 한 우물을 판 게 아니라 학생들이랑 이것저것 같이 했으니까. 그렇게 아주 다양한 동물을 연구했잖아요. 외부 심사과정에서 “백과사전의 총괄 편집장으로 우리 학회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라는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눈물이 팍 쏟아지더라고요. 내 딴에는 제자들에게 내 삶을 양보해 놓고 억울한 게 조금 있었어요. 내가 내 삶을 양보하지 않고 한 우물만 팠다면 나도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이번 개정판이 내 분야의 한 오백 명 정도의 학자가 동원돼 만들어져요. 어떻게 보면 내가 평생 몸담은 분야의 총결산이잖아요. 총괄 편집장이 되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더 바랄 게 없는 거죠. 내 제자들 덕이죠. 제자들과 함께 열심히 해서 좋은 논문을 많이 쓰고, 그래서 오히려 잘 된 거구나 싶어서 기분이 되게 묘하더라고요. 조금 있으면 책이 나올 텐데. 이제 책 표지에 내 이름이 박히는 거죠. 나로서는 상상도 못하던 영광스런 일이에요.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주고픈 말씀이 있다면?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고 인생이 모두 결정 나는 건 아니잖아요. 또 서울대에서 제일 들어오기 힘든 학과가 의예과인 것 같은데 옛날에 내가 시험 칠 때는 최고로 높은 데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최고잖아요. 의예과에 들어왔으면 인생이 끝인가요? 입학하면 인생이 그대로 성공한 건가요? 아니죠?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매우 길고, 변화도 무궁무진할 거예요. 예전의 나처럼 학교를 그냥 쭈그린 채로 다니는 학생이나 후배가 있다면 진짜 한 마디 하고 싶어요. 세상 일 아무도 모른다고…. 내가 겪은 일처럼 별 볼 일 없던 학문이 괜찮아지기도 하잖아요. 살다 보면 꼭 볕들 날이 있어요. 내가 유학을 갈 때도 환송회 날에 교수님들하고 선배들하고 전부 나한테, 왜 하필 동물행동학을 하러 미국까지 가냐고 그랬어요. “동물의 왕국 찍으러 미국까지 뭐 하러 가냐. 우리 동네에 동물 많아!”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미국에 갔어요. 그런데 살다 보니까 내가 변화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변해주기도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몰라요. 지금 자신이 처한 처지를 너무 비관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세상은 자꾸 변해요. 지금 잘나가는 분야도 나중엔 시들해질 수도 있고,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학문도 몇 년 지나면 최고로 잘나가는 학문이 될 수 있어요. 그러니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언젠간 해 뜰 날이 올 겁니다. 볕이 좀 안 들면 또 어때요. 잘나가는 분야에서 많은 사람과 경쟁하는 것과 조금 별 볼 일 없는 분야에서 몇 사람이 경쟁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큰 차이가 없어요. 우리는 잘나가는 분야에서 내가 잘나갈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착각하지만, 꼭 그러리라는 법도 없어요.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주변 환경을 너무 탓할 필요 없어요.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 속에서도 내가 진정 이걸 즐길 수 있느냐, 이걸 진짜 좋아하느냐, 그것만 따지면 될 것 같아요. 그럼 분명히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