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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공, 나의 진로

모든 것의 핵심은 친구가 되는 거라네

법과대학 법학부 서용현

추운 겨울날, 서초의 한 카페에서 만난 서용현 교수님은 정년 은퇴를 앞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정정한 분이셨다. 30년의 외교관 경험과 지금은 교수로 정년을 맞고 있다는 간단한 약력에서 풍기는 중후한 무게감에 필자는 추운 날씨는 둘째 치더라도 온 몸이 굳고 있었다. 그러나 긴장감은 한순간 온데간데없이 풀어지고 말았다. 카페 안으로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오신 교수님께서는 만나자마자 호탕한 웃음과 함께 필자에게 명함을 건네주셨다. 순식간이었다. 그러고는 명함에 적인 스페인어 이름 ‘호세(Jose)’의 유래를 호탕한 웃음소리와 더불어 그 의미를 말씀해 주셨다. 호세는 우리나라로 치면 철수처럼 남미국가에서 흔한 이름이다. 그래서 남미 사람들은 이 이름에 많이들 반가움을 표시한다고 한다. 교수님은 필자에게 이런 식으로 상대가 자신을 기억하고 친구가 되는 게 외교의 핵심이라고 강조하셨다.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이었지만, 외교관으로서 친구를 만들며 즐겁게 살아오신 교수님의 삶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교수님의 ‘친구 만들기’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아보기로 하였다.

외교관을 하셨을 때, 처음부터 ‘친구 만들기’를 잘하셨나요?

아니, 처음에는 잘 못 했지. 그리고 외교관 일을 시작했을 때는 별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억지로 하게 됐지. 원래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잘 안 해. (웃음) 그래서 처음에는 멍하니 앉아서 집에 갈 날만 기다렸지. 그러면서 10년 정도가 지났지. 그즈음 한미통상협상 일을 맡게 됐는데, 처음으로 재미를 느꼈지. 헤비급 선수랑 플라이급 선수가 싸워서 플라이급 선수가 이길 수도 있는 그런 일이었으니까. 그 때부터 열심히 하기 시작했지.

그 뒤에는 외교관 일이 재미있으셨나요?

응, 재미있었지. 상당히 도전적인 일들이 많았고.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이상한 콤플렉스가 있어. 키 작거나 영어를 못해서 생기는 콤플렉스 때문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는 편이야. 나는 그냥 상당히 막무가내로 다가갔어. 기본적인 개념은 그거지. ‘너와 나는 친구다.’ 아니면 ‘친구가 되자.’ 그래서 나는 순식간에 내 모든 걸 보여주고 매 순간 상대방에 배려하려고 했고, 그러다보니 친구가 쉽게 될 수 있었지.

보통은 ‘외교관’ 하면, 문서 작업이나 의전과 같은 행사에 참석하는 걸 주로 떠올리는데, 교수님의 말씀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런 일들은 외교관의 주요 업무가 아니야. 외교관은 그런 걸 하는 사람이 아니야. 외교관은 사람 만나는 일을 하는 직업이야. 우리나라에서 외교관들이 문서작업을 주로 한다고 알려진 건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그게 주는 아니지.

제가 누군가를 사귀면 단순히 친구 사이일테지만, 외교관은 국익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친분을 쌓을 때 조심스럽지는 않나요?

아니지. 우리와 적대 관계의 나라라도 사람들끼리는 친구가 될 수 있지.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의 외교가 일본과 적대적으로 만들어진 건 문제라고 봐. 일본이 삐딱하게 나온다고 해서 우리도 삐딱하게 굴고, 그러면 이 문제는 절대 안 풀려. 일본을 품어야지. 일본은 콤플렉스가 많은 나라거든. 그러지 않고 이렇게 해서는 진전이 안 돼.

친구가 되려고 다가가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교수님은 정말 외교관이 천직이신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 교수님은 원래 외교관이 아닌 PD를 꿈꾸셨다고 들었어요.
외교관이 되신 걸 후회하신 적은 없나요?

내가 외교관이 돼서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일한 게 내가 스스로 내린 결정은 아니라고 봐. 기자님이 다니는 ‘자유전공학부’에서 말하는 그 자유랑은 약간 다르다는 거지. 나는 그 결정을 신이 했거나 그렇게 하도록 날 밀었다고 생각해. 싫어하면서 할 수 없이 외교관 일을 하게 됐거든. 왜냐면 쉽게 말해서 고시 붙었는데 그거 관두고 다시 PD시험 준비하겠다고 하면 당시에는 정말 미친 거로 봤거든. 그래서 그냥 계속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신은 역시 위대해. (웃음) 보니까 PD도 대단한 일을 하긴 하지만, 외교관은 엄청난 기획을 할 수 있거든. 나라끼리의 관계를 유지하고 나아가 전 세계의 안보를 함께 기획하고 아니면 나라들끼리 동맹을 맺는 걸 기획하기도 하지. 그중 나는 특히 사람 사귀는 걸 기획하는 일을 특히나 좋아했지. 내가 누구랑 친해지고 싶으면 그냥 가서 친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안 되는 경우도 있어. 예를 들어서, 베네수엘라에서 육군 사령관이라고 하는 그 당시 2인자와 친해지기로 했어. 그 사람을 연구해보니, 그 사람이 도교에 심취해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그래서 편지에다가 다른 말들을 쓴 다음에 맨 밑에다가 ‘상선약수’라는 말을 한자로 썼어. 그러면 확 눈에 띈단 말이야. 그러니까 금방 나한테 오라고 하더라고. 그러고 나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됐어.

고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외교관이 선망 받는 직업인데요,
외교관의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선 불필요한 무게 잡고 그런 건 다 잊어버려야해. 그리고 아까 말한 대로 외교는 ‘친구 만들기’야. 우리나라에서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때, 서울에서 나한테 이상한 지시가 왔어. 동계올림픽과 관련해서 일을 시킨 거였는데, 원래 정부는 그런 일에 개입하면 안 되거든. 그래서 일을 하지 않는 척하면서 하라는 게 지시였어. 난 그때 바베이도스에 있었는데, 그곳의 유명한 육상선수와 친해지는 게 임무였어.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그 사람이 낚시를 엄청 좋아하고, 골프는 좋아하는데 되게 못 친다는 거야. 그런 정보들이 쭉 나오더라고. 그래서 편지를 썼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인용했지. ‘헤밍웨이 소설 속의 노인이 바베이도스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한번 가서 도전을 해보겠다. 호텔까지 예약해놓아라.’ 이렇게 적었지. 그렇게 하고 하루 만에 절친한 친구가 됐지.

 

외교관으로 재직하던 시절(중앙에 앉은 사람이 서용현 교수)

 

 

외교관으로 재직하던 시절(중앙에 앉은 사람이 서용현 교수)

정말 친구 만들기의 달인이신 것 같아요. 베네수엘라 말고 어떤 나라에서 근무했나요?

미국에서도 근무했는데, 내가 제일 좋아했던 나라가 필리핀과 베네수엘라야. 다른 친구들(외교관)은 아마 그 두 나라를 제일 싫어할 거야. 그런데 난 기준이 좀 달라. 또, 스위스 제네바랑 파리에도 근무했지. 근데 나는 제네바의 분위기가 싫어서 친구들에게 나는 'Rule Based System'은 신물이 난다고 말했지. 대신 나는 ‘Love Based System'이 좋다고 말하고 다녔어. 그랬더니 외교관 친구들이 놀라곤 했지. 다른 친구들은 정말 미쳤다고 생각할 거야. (웃음) 보통은 안 그렇거든.

외교관들은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2~3년씩 다른 나라에서 살게 되잖아요.
그렇게 한 나라에 정착을 안 하고 계속 옮겨 다니는 생활은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내가 간 나라들은 사실 다 제2의 조국처럼 느껴져. 베네수엘라에서 ‘이곳은 나의 제2의 조국이다.’라고 말하니까, 필리핀 대사가 와서 ‘저번에는 필리핀이 제2의 조국이라지 않았나요?’라고 되묻는 웃긴 일도 있었지. (웃음) 그리고 이렇게 살면 정말 삶이 풍요로워져. 어떤 친구들은 꼭 유럽에서 근무하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삶의 폭이 좁아지지. 나는 특히 현지인들이랑 잘 친해져. 베네수엘라에서는 빈민촌이 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하루에 한 명씩 거기서 죽는다는 거야. 근데 난 거기를 꼭 가보고 싶었어. 그래서 직원들에게 같이 가자고 하니까, ‘아이고!’ 하면서 무서워하는 거야. 할 수 없이 현지인 운전사에게 부탁해서 그곳에 좀 가자고 했는데 그 운전사도 거절했지. 고민하던 참에 그때 영사국장이 새로 왔는데, 그 국장이 알고 보니 빈민촌 출신인 거야. 베네수엘라에서는 제일 거지가 들개래. 먹을 게 없어서 매일 쓰레기통을 뒤지거든. 근데 그게 하층민들이 자신을 부르는 말이래. 그래서 친구를 만나서 ‘내 이름은 호세(Jose)고, 내 별명은 들개다’, 이렇게 말했지 그러더니 그 친구도 눈을 번쩍 뜨면서 ‘나도 별명이 들개다!’라고 말하는 거야. 그때부터 같이 술도 먹고 함께 일도 하면서 정말 친해졌지. 그래서 나중에 그 친구한테 함께 빈민촌을 가줄 수 있냐고 물어봤지. 그러니까 그 친구가 걱정하지 말라는 거야. 왜냐면 알고 보니까 베네수엘라에서는 복수에 의한 살인이 대다수라는 거야. 그런 관계에 있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은 큰 위험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그러면 그런 친구들이랑 친해지고 말이 통하기 위해서 교수님은 언어 공부를 열심히 하셨나요?
이야기를 듣다보니, 교수님께서는 다양한 언어를 잘 하셨을 것 같아요.

아니지. 다 되게 돼 있어. 난 어디 출장을 간단하게 갈 때는 딱 두 가지만 외워가. ‘예쁘다’는 거랑, ‘사랑한다’ 이렇게 두 가지만 준비하는 거지. 그러면 자연스럽게 모두와 친구가 돼. 마음만 열면 돼.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즘은 영어가 웬만한 곳에서 통하기 때문에 말이 되게 되어 있어.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외교관의 일을 즐겁게 하신 것 같아 듣는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의외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외교관은 국익을 위해서 일하는 만큼 사명감을 크게 느끼실 텐데, 일이 힘들거나 부담스러울 때는 없었나요?

크게 간과한 사실이 있는데, 사명감이 있는 일을 멋지게 해내는 게 최대의 즐거움이야. 사명감이 있는데 내가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이루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 나만의 방식으로 일들을 해내는 거지. 그게 최고지. 그리고 나는 일생을 즐겁게 살아왔어. 고등학교, 대학교 때도 많이 놀면서 얼마나 즐겁게 살았는데. 질문으로 돌아가면 사명감과 즐거움은 하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인 거지.

대학생 때는 어떤 일에 열정을 가지셨나요?

주로 놀고, 연애하고 술집도 운영했지. 그리고 지금의 동아리 같은 곳은 그땐 없었어. 연애는 정말 열심히 했어. 고등학교 때도 정말 많이 놀았어. 공부보다는 주로 놀았지.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놀았다는 말을 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허송세월했다는 말로는 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논다’라는 것은 자기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고 그 즐거움을 위해 준비하고 노력한다는 말이야. 지금 내 나이에 어린 시절 기억이 아주 뚜렷하지 않아 하는 말이니 대학생이 논다라고 하는 말을 정말 유희만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단정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내가 말하는 것은 시험공부만을 위해 도서관에서만 살지 않았다는 말이니까.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의 사람마저도 친구로 만드는 것이 외교관의 핵심!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의 사람마저도 친구로 만드는 것이 외교관의 핵심!

그러면 공부는 어떤 방식으로 하셨나요?

나는 공부하는 방식이 좀 특이했어. 여기서도 ‘패러다임의 전환’이 나와. 수업시간에 집중하다 보면 사람인 이상 졸음이 오고 나도 그걸 참지 못하는 학생이었어.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내가 자기 시간에만 조는 줄 알고 기분이 안 좋으시더라고. 그래서 방법을 바꿨지.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30페이지를 나가면 난 혼자 40페이지를 나갔어. 그러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선생님께서 30페이지 수업하실 때 모르는 걸 여쭤봤지. 말하자면 ‘호기심 공부’지. 궁금한 걸 만들어놨다가 선생님께 물어봤어. 그래서 난 애들보고도 호기심으로 공부하라고 하지. 무슨 시험을 준비하든 똑같은 걸 똑같은 방식으로 공부하면 지루하기만 하고 머리에 안 들어와. 난 그리고 단순암기를 하지 않겠다는 소신은 꼭 지켰어. 또 시험을 무시한다는 원칙을 고등학교 때 세웠어. 무시가 시험을 보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야. 우리가 공부할 때 꼭 나올 만한 내용만 찍어서 공부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심지어 이런 걸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나는 그렇게 범위를 좁히고 요령만 피면서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버렸지. 물론 이런 공부 방식 때문에 학교 내신 성적은 확 내려가더라고. 어머니 아버지껜 이제 학교에서 성적표 안 보내준다고 말씀드릴 정도로 말이지. (웃음) 그런데 암기를 안 하고 공부를 하니까, 학교 중간 기말 성적은 내려가는 대신에 전국 단위 모의고사 성적은 항상 1등이었어. 당시 모의고사가 지금 모의고사랑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름 가리지 않고 체계적으로 깊이 있게 공부한 효과가 나온 것이지. (참고로 1971년 즈음은 예비고사를 통과한 고등학생이 대학교에서 치르는 본고사를 통해 학생을 선발하던 시기입니다.) 난 내가 싫어하는 건 잘 안 해. 인생 한번 사는 건데 왜 싫은걸 억지로 하면서 살겠어? 그래야 즐겁게 살지.

이 웹진을 보는 고등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이 있나요?

‘못 먹어도 Go!’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 내 방에 지금도 붙여져 있는 말이야. 되든 안 되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저질러 보라는 이야기야. 그리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어. 암기를 위한 공부 절대 안 했으면 좋겠어. 억지로 뭔가를 해서 들어가도 그 안에서 결국에는 도태돼. 시험공부를 하더라도 꼭 시험 점수만을 위한 암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배우는 그것 자체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공부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무엇이든 ‘안다’라고 말할 수 있고 ‘질문’이란 것을 제대로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글·사진양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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