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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계 이슈이슈!

나는 교실에서 질문을 배우는 중이다

최정인 순천금당고등학교 교사


수업은 교사의 준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수업이란 교사의 의도와 학생들의 반응이 뒤섞이고 충돌하면서 예기치 않은 배움이 발생하는 장면들의 모임이다. 나는 국어 교사로 살아오며 늘 이런 순간들을 갈망해왔다. 교실에서 학생들이 무언가를 ‘이해’했을 때보다, 자기 안에서 새롭게 질문을 만들었을 때 더 큰 기쁨을 느낀다. 그 질문은 때론 문학작품의 복잡한 상징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사소한 감정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학생들의 그런 질문은 내게 매번 다시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는 지금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가?’라는, 아주 기본적인 물음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나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고, 자기 삶을 돌아보며, 결국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러한 바람과는 무색하게 강의식 수업이 입시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진행했던 많은 수업의 장면들은 참으로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고, 반성이 된다. 지금까지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가게 둘 수는 없는 법. 그래서 매번은 아니더라도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며 쓰는 방향으로 구성해 보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다. 이러한 노력이 통하는 순간을 돌이켜보면 어떤 학생들은 내가 건넨 질문에 당황하고 또 어떤 학생들은 교과서 속 문장을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여다보며 조심스럽게 손을 든다. 그런 교실의 장면들이 쌓이면서 나 역시 더 좋은 교사가 되기를 꿈꾼다. 이 글은 그런 나의 수업과 학생들의 응답, 교사로서의 성장에 관한 단상이다.

1. 고시원 1평에서 시작된 질문 – 문학과 수학 사이에서

소설가 박민규의 ‘갑을고시원 체류기’는 비정규직 노동자, 주거 빈곤, 무한 경쟁과 같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고시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주인공은 아버지 사업 부도의 여파로 인해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친구 가족들과의 아침 식사에서 유독 자신에게만 계란 프라이가 빠진 것을 눈치챈다. 그것이 친구 어머니의 의도된 행위임을 인지하고 그날로 짐을 싸서 고시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좁고 축축한 방 안의 묘사는 단지 주거 공간이 아닌 인간의 존엄과 삶의 품격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사실과, 이 세상은 혼자만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의 이러한 지점을 우리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모두 함께 전문을 읽고,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수업을 설계하였다. 무엇보다도 심혈을 기울였던 것 중 하나가 간접경험인 독서의 제한점을 넘어서서 스스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직접경험의 세계로 학생들을 초대해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협업 수업을 진행하기로 한 수학 선생님과 함께 우드락폼보드를 재단해서 바닥 면에 세 개의 벽면을 붙여 고시원 1평 방의 크기인 3.3m2 를 구현하여 수업이 이루어질 교실의 중앙에 설치하였다. 평소에 없던 설치물이 교실에 있어서인지 학생들은 약간의 관심만 보일 뿐 크게 호기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수업이 시작되었고 이미 읽은 작품 내용에 대해 서로 확인하고 정리하는 동안 ‘고시원 생활’이 무엇인지에 대해 친구들끼리 의견을 주고 받았다. 그러면서 교실 한가운데 설치된 1평 남짓한 공간의 조형물에 호기심을 보이는 듯하였다. 쭈뼛거리고 있는 학생들에게 모두 일어서서 한 사람씩 공간에 들어가 누워보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꺄르르 웃으며 앉고 눕고 서 보던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한 학생은 신발을 벗고 진지하게 그 공간 안에 누워서 양팔을 기지개 켜듯 펼쳐보기도 했다. 평소에도 쾌활하고 외향적이었던 그 학생은 두 손을 머리 위로 모으고 말했다.

“이 안에 하루종일 있어야 한다면, 진짜 아무 말도 안 하게 될 것 같아요. 너무 답답해서요.”

이 이야기에 순간 다른 학생들은 조용해지기도 했다. 그 1평의 공간에, ‘살아야 하는’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이후에는 톨스토이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 대한 동영상 매체 자료를 활용하여 핵심 내용과 질문거리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고, 작품의 주제와 연결해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공간’과 ‘재화’가 필요한 걸까?’라는 질문에 한 학생이 보여줬던 반응이 기억에 남는다.

“저는 최소한 혼자만의 공간, 잠을 잘 침대, 따뜻한 한 끼, 마음 붙일 사람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중 하나라도 빠지면 살 수는 있어도 살고 있다는 느낌은 안 날 것 같아요.”

그 학생의 말은 교실을 잠시 멈추게 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작게 말했다.

“그러면, 그게 없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

뜻밖의 유레카였다. 수업 설계 당시에는 상상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었던 반응과 소통이었다. 늘 성장해야 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하는 것이고, 학생들을 통해서 교사는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을 ‘자극 없는 자극’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장면이었다. 국어 수업이 끝난 뒤, 수학 선생님과 함께 준비한 협력 수업을 이어갔다. 학생들이 체험한 1평의 공간, 그 실제 넓이를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구분구적법' 수업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이 수학 수업에서는 먼저 복잡한 도형을 간단한 기본 도형으로 분해하고, 각 도형의 넓이와 부피를 구한 뒤, 그것의 극한값을 통해 전체 넓이를 추론하는 구분구적법의 원리를 학습했다. 학생들은 피자 조각이나 나뭇잎 같은 불규칙한 형태의 면적을 계산해보는 활동을 통해 실제 적용의 흥미를 느꼈다. 이러한 흥미를 반영하여 책에 제시된 고시원 방의 실제 크기를 계산해보며 수학적 사고가 삶과 문학을 해석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체감할 수 있도록 수업을 진행했다. 협력 수업을 통해서 문학은 문제를 제기하고, 수학은 그것을 다루는 방식 중 하나를 보여준다는 점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고, 이러한 과정이 담긴 협력 수업이 펼쳐지는 교실은 바로 이 두 가지가 만나는 곳이라는 점을 깨우치게 된 경험이 되었다.

2. 적다와 작다 사이 – 해석의 권리를 되찾은 교실

전달되고 이해되는 수업이 아니라, 스스로 해석하고 의미를 구성하는 수업에 대한 갈망이 컸다. 강의식 수업에 길들여졌던 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동력 삼아서 조금 더 성장해 보고자, 또 변화해 보고자 수업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마침 교과서의 마무리 활동지 한구석에 참여시의 대부인 김수영 시인의 작품이 실려 있었다.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4.19혁명 이후 5.16 군사정변을 통해 다시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가 자리 잡은 1960년대 초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정치적 억압 속에서 시민의 자유와 존엄은 다시 침묵 당했고, 시인은 고궁을 나오는 행위에 ‘시민의 광장’을 잃어버린 시대의 허무와 분노를 투사한다. ‘고궁’은 과거와 권위의 상징이고, 시인의 발걸음은 현실로 돌아온 인간의 결연한 의지를 상징한다. 작품이 내포하고 있던 시인 삶, 시대의 맥락을 중심으로 해서 총 3차시로 수업을 진행하였다.

1차시에는 시인이 살았던 시대적 맥락을 외재적 관점에서 소개했고, 2차시에는 시 전체가 인쇄된 활동지를 나눠주었다. 3차시에는 내신 평가 준비를 위해 일제 강의식 수업을 진행했다. 특히 2차시 때는 해석과 관련한 줄글도 없이 오직 텍스트만을 마주한 채, 학생들은 스스로 의미를 구성하였다. 개인별 해석을 마친 후, 모둠활동으로 이어지는 수업 과정을 안내하였다. 학생들은 ‘옹졸’, ‘자조’와 같은 핵심어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개별적 작품 해석을 위해 활동지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던 한 학생의 기록이 기억에 남는다. ‘화자가 소리 높여야 할 자리에선 오히려 침묵하고 있다. 그게 어떤 체념 같기도 한데, 나는 그게 더 슬프게 느껴진다. 외칠 힘조차 없을 만큼 무기력한 모습이다.’ 이 학생은 이 시에서 느껴지는 자조적인 정서를 ‘분노의 포기’라고 표현했다. 너무 놀랐다. 시에서 느껴지는 정서를 자신의 생각과 정서를 고려하여 주체적으로 해석을 이끌어내고, 그러한 해석을 꿰뚫는 촌철살인과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감탄했다. 개별적 작품 해석 활동 이후에 모둠 발표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조곤조곤 학우들에게 잘 전달하였고, 그 발표의 끝에 이렇게 말을 했다.

“저도 가끔 그런 기분 들어요. 말해도 안 바뀔 거라는 생각요. 근데 이 시가 그걸 그대로 써줘서, 조금 위로가 됐어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문학이 때론 직접적인 해결보다 함께 주저앉아주는 언어라는 것을 다시 떠올렸다. 그 순간 교실은 해설이 아닌 감정의 공간이 되었고, 문학은 시험이 아닌 위로가 되었다. 이 수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내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마지막 연의 서술어가 ‘작다’가 아닌 ‘적다’로 오타가 난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학생들의 해석이 기가 막혔다. 오타 부분에 대한 안내를 했더니 학업, 교우관계, 운동까지 두루 골고루 갖추고 있어서 내심 육각형 인재라고 생각하고 있던 한 학생이,

“이거 혹시 오타가 아니고 의도된 거 아니에요? ‘작다’가 아니라 ‘적다’라고 한 건 화자가 단지 보고 느끼는 외형적 현실이 좁고 작다는 느낌만 있는 게 아니라, 자기 내면의 결핍감이나 옹졸함까지 진정성 있게 자책하고 있다는 뜻을 드러내기 위해 ‘적다’라고 쓸 수도 있잖아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내 실수를 통해 오히려 학생은 텍스트의 다의성과 해석의 층위를 정확히 짚어냈다. 과한 판단일 수 있겠지만 어쩌면 김수영 시인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교사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수업 시간을 통해서 정확한 교과의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학생들의 사유와 감정, 감각을 신뢰하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수업이 끝나고 나는 조용히 그 학생에게 말했다.

“선생님도 그 말에 정말 공감했어. 오타였지만, 너 덕분에 선생님이 더 배웠다.”

그 학생은 웃으면서 말했다.

“진짜요? 그럼 이제 오타는 걱정 안 하셔도 되겠네요.”

교실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해석으로 충만하다. 그리고 그 해석은 정답이 아니어도 되는 순간에 비로소 살아난다. 나는 그날 이후, 문학 수업의 목표를 바꾸었다. ‘해설을 전하는 수업’에서 ‘의미를 만들어 가는 교실’로.

3. 한 사람은 한 권의 책 – 책을 쓰는 학생들과 함께 걷기

책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글을 길게 쓰는 연습을 넘어선다. 2014년부터 책쓰기 동아리의 지도교사로 활동해 오면서, 나는 그 사실을 해마다 되새기게 된다. 『에그로 숨』(2014)이라는 첫 책에서 시작해 『황금연못에 그리는 청춘의 기록』(2024)에 이르기까지, 열 권 가까운 책에는 학생들이 자신만의 목소리로 세상에 말을 건네려는 시도의 결과물이 담겼다.

교육청으로 파견 교사 업무를 나가게 된 2년을 제외하고는 책쓰기 동아리 담당 지도교사를 맡아서 학생작가들과 꾸준하게 만났다. 해마다 동아리 수업을 시작할 때 약간의 순서 차이는 있었지만, 항상 영화 ‘프리덤 라이터스’를 함께 시청하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집필한 ‘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갈등과 분열이 가득한 고등학교에 부임한 젊은 교사 에린 그루웰이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통해 상처와 차별, 폭력을 직면하게 하는 과정을 그린다. 학생들은 글을 쓰며 자신이 겪은 고통을 표현하게 되고, 점차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변화해 간다. 이 영화는 우리 동아리의 방향을 제시해 준 나침반 같은 작품이었다. 영화는 책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는데, 책 내용 중 한 부분을 발췌하여 학생들과 생각 나눔을 하였다.

나 자신이 로버스 프로스트가 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에 나오는 여행자처럼 느껴진다. “숲 속에 난 두 갈래 길 중에서,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고, 그 후로 모든 것이 변했네.”라는 시구가 바로 나의 현재를 말해 주고 있다. 나는 두 갈래 길 앞에 선 여행자와 같다. 내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가족이 걸어간 길을 따라 바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따라 가족 중 처음으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 길이 결국은 나를 더 나은 미래로 데려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앞서 걸어가고 나면, 내 여동생들은 나만큼 두려워하지 않고도 그 길을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에린 그루웰, 『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 랜덤하우스, 2007년, 399쪽

나는 동아리 활동을 시작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은 한 권의 책이다. 우리는 지금, 서로의 책장을 조심스럽게 넘겨보는 일을 하려는 것이다.”

이 말을 처음 들은 학생들은 별 반응이 없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미를 자기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사회 속에서, 뚫고 올라가지도 못할 유리천장 속에서 자신의 잘못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반성하고 결국은 수용하며 적당히 타협하는 이러한 과정들이 무의식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으면 한다는 마음이 컸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길만을 가는 것보다는, 개천에서 살아가는 미꾸라지 나름대로의 삶을 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의도가 있었다. 영화를 감상하고 원작 도서에 대한 생각 나눔뿐만 아니라 학생 작가로서 닮고 싶은 작가의 책을 스스로 고르고 끝까지 읽으며 작가의 언어를 체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후 주제를 정하고, 초고를 쓰고, 수차례의 퇴고를 거치며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나는 학생들이 단순한 독자가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책쓰기 동아리와 관련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은, 사학과 진학을 꿈꾸던 한 학생의 이야기였다. 그 학생은 광주 5·18 민주항쟁을 주제로 삼아 ‘우리 가족이 겪었을 수도 있는 아픔’에 대해 글을 쓰고자 했다. 학술자료를 찾아 읽는 일은 성실히 해냈지만, 역사적인 사건들이 담고 있는 구체적인 장면을 자신의 언어로 담기엔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고, 지도교사인 나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나 역시도 사료를 통해서만 익히고 배운 정도였고,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장면에 대해서는 도움을 주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신이 늦둥이로 태어나서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때 사춘기가 심하게 왔고 그 이후로 아버지와 소원하게 지내고 있다는 알게 되었다.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을 내심 원하고 있는 바를 느낄 수 있었고, 아버지의 고향이 광주여서 어릴 적에는 광주에서 생활하다가 현재는 순천에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 조언의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이번 책쓰기 주제와 관련하여 광주 출신인 아버지와 대화를 나눠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고, 고민 끝에 오랜 시간 소원했던 아버지에게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그 과정에서 학생과 아버지는 뜻밖의 여정을 함께 하였다.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그날의 광주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옛 전남도청 터부터 전일빌딩까지 동행하며 그 시절의 풍경을 함께 되짚었다. 학생은 전일빌딩 벽면에 남겨진 총탄 자국과 침묵하는 시민들의 기념 촛불을 보며, 역사는 기록의 문제일 뿐 아니라 기억의 문제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달았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음성에 여전히 나를 귀하게 여겨주시는 따뜻함이 묻어 있어서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다고 나에게 후일담을 전해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아버지에게

“민주화운동에 대해 전문가 수준으로 알고 계셨음에도 왜 그동안 이 이야기를 안 해주셨어요?”

라고 조심스럽게 물었고, 아버지는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내가 잡지 못 했다.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현재가 너무도 뿌듯하고, 마음을 열어준 아들아 고맙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학생은 작가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평생 하지 못했을 이야기였고, 덕분에 아버지의 마음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세상이 아니라, 개천에서 살아가는 미꾸라지로서의 삶도 충분히 의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는 용이 되진 않았지만, 나에게 가장 든든한 미꾸라지였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오래도록 마음이 먹먹했다.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한 그 지난한 여정이, 누군가에겐 삶을 직면하고, 관계를 회복하며 자신을 발견하는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학생들이 작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기에, 나 역시 교사로서의 성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텅 빈 교실에 남아 조용히 교탁 앞에 서 있는 시간들이 있다. 분주했던 하루의 말소리가 가라앉고, 학생들이 앉아 있던 자리를 하나하나 되짚으며 나는 생각에 잠긴다. 오늘 나는 무엇을 가르쳤고, 무엇을 배웠는가. 언뜻 보면 내가 학생들에게 글 읽는 법과 글 쓰는 법을 가르친 것 같지만, 사실은 그 학생들이 내게 ‘사람을 바라보는 법’, ‘말을 기다리는 법’, ‘교사로 살아가는 마음’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는다. 교사는 결국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할까. 국어 교사로서 문학의 기술이나 표현의 정확함을 가르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질문을 품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질문은 혼자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질문은 타인을 만나야, 현실을 마주해야, 때로는 침묵과 오해 속에서 길을 잃어봐야 비로소 깊어진다. 그런 질문이 교실 안에서 태어나는 장면을 보는 일이 내가 교사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학생들이 보여주는 진지한 눈빛, 조심스럽게 던지는 말 한마디, 때로는 내 실수에서 피어나는 반짝이는 통찰들이 교사인 나를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가르침’이란 결국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교실은 완성된 지식이 일방적으로 흘러나오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말과 침묵이 울리는 가운데 배움이 자라는 곳이다. 그 배움은 성적표로는 확인되지 않고, 학기 말 결과물로도 증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교실에서 피어난 하나의 질문, 말끝에 남겨진 여운, 서로를 이해하려는 몸짓 속에 담겨 있다.

앞으로도 나는 수업을 계획하면서 학생들이 스스로 삶을 돌아보게 하고, 타인의 마음을 상상하며, 글을 통해 자기 존재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는 시간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역시 수업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는 교사로 살아가고자 한다. 정답만을 강요하기보다 함께 생각하고, 먼저 말하기보다 들어주는 사람이 되려 한다. 그렇게 배움은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의 모습으로 증명하고 싶은 교사로 남고 싶다. 배움을 멈추지 않는 교사, 학생들의 말 앞에서 매일 다시 생각하는 교사, 그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나를 받아들이며 교실에 선다. 그리고 오늘도 조용히 다시 묻는다.

“이 질문, 우리 함께 생각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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