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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계 이슈이슈!

질문하는 학생을 위하여

김지형 삼각산고등학교 교사



1. 질문의 힘

「소나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소년과 소녀가 수숫단에서 비를 피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수숫단 장면 이전에 소년과 소녀가 비를 피한 곳은 사실 원두막이었다. 하지만 원두막은 “기둥이 기울고 지붕도 갈래갈래 찢어져” 비를 피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년은 수숫단을 생각해 냈고, 소녀가 비를 피하게 되었다.

작가 황순원은 원두막을 비를 피하기에 적합한 곳으로도 설정할 수 있었다. 그는 작가니까. 하지만 시계 부속들이 맞물리는 것처럼 소설을 구성하는 황순원이라면, 이러한 구성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왜 원두막에서 수숫단으로 옮겼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소설을 다시 꼼꼼하게 봐야 한다. 수숫단의 좁은 공간으로 소녀는 소년을 부른다. 소녀가 뒷걸음질 하면서 꽃묶음이 망가진다. 소녀가 꽃으로 은유된 소설 처음 부분과 연관해서 읽으며, 망가진 꽃묶음은 소녀의 불행을 암시한다. 소위 복선이다. 이러한 복선을 위해 작가는 원두막에서 수숫단으로 옮겼다? 그런데 단지 꽃묶음의 망가짐을 의도하기 위해서라면 원두막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복선은 충분하지 않다. 좀 더 설득력 있는 답을 위해서는 다시 읽어야 한다.

2. 생각의 틈 내기

‘왜 수숫단일까?’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되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학생들은 작품을 스스로 분석하고 종합한다. 그리고 모둠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서로 나누면서 작품의 구성과 표현, 주제 의식이나 의도에 대한 의견들을 나눈다. 이러한 수업은 「소나기」의 인물과 배경, 사건, 주제 등에 대해 교사가 잘 정리해서 설명하고, 학생이 듣고 이해하는 수업과 다르다. 나는 질문을 통해 글을 다시 보는 학습이 작품을 ‘읽고’ ‘감상’하는 과정이자, 문학 교육의 목표를 달성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학생들이 질문을 하게 되면, 교사는 정말 편하다. 단순한 호기심 차원 이상의 것을 질문하는 학생들을 자세히 보면, 소위 ‘자기주도’ 학습 역량이 뛰어난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질문하는 학생들은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는 학생들이고, 이 학생들은 학습의 책임을 스스로 떠맡는 태도를 보인다. 스스로 하는 학생만큼 교사를 편하게 하는 학생들이 있을까. 그래서 중학교보다는 고등학교 교사가 편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내가 만난 많은 고등학생들은 여전히 교사가 중요한 것들을 쉽게 풀어서 알려주기를 바라는, 학습의 책임이 교사에게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교직을 시작하면서 나는 학생들에게 ‘질문해’라고 ‘요구’했지, 학생들이 질문하게끔 학생들에게 ‘질문’하지 못했다. 학부 시절에 문답법을 비롯해 질문의 중요성과 방법에 대해 듣기도 했고, 교사가 된 뒤에는 교사의 발문에 대한 책이나 논문들도 읽어보았지만, 실제 수업에 적용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질문의 중요성은 이해했지만 학생들이 질문하게 하는 방법은 쉽게 ‘내 것’이 되지 않았다.

질문이 있는 수업을 하기 위해서 내가 쓰는 전략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이 ‘어?’ 할 수 있는 질문을 만드는 것이다. 이 ‘어?’는 어떤 불일치의 경험, 자신의 지식 구조가 파열되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 강도가 크면 클수록, 학생들은 그 파열을 봉합하기 위해 글에 더욱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문학 교과서에 한국 문학의 풍자적 특질을 이해하는 단원에 채만식의 「미스터 방」이 실려 있다. 이 작품은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하는 해방 직후의 혼란한 사회 상황을 비판적으로 그린 소설인데, 학생들은 ‘미스터 방’이라는 인물의 기회주의적 성격을 풍자하는 작가의 방법과 태도를 학습하고, 이러한 풍자가 고전에 이어 현대에도 주요한 문학적 특질임을 이해하는 수업이다.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기회주의자가 뭐지?’라고 넌지시 질문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대개 ‘상황에 따라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인물’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다시 질문한다. ‘그럼, 우리 모두가 기회주의자인 건가? 우리와 미스터 방은 어떻게 다르다는 거야?’ 그러면 학생들이 대개 ‘어?’ 한다.

독서 과목에서도 이러한 전략을 자주 사용한다. 「육지의 배설물은 바다에 쌓인다」라는 논설문을 제재로, 글쓴이의 주장과 논증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창의적 읽기’에 대해 수업을 할 때, 일단 학생들에게 글의 주장을 찾아보게 한다. 그러면 대개 학생들은 글의 끝부분에 주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 예측에 따라 해당 내용을 찾아 발표한다. (사실 학생들이 찾은 것은 주장이 아니라 반론과 반박의 내용에 해당한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한다. ‘만약에 그게 주장이라면, 본문의 이 부분은 도대체 왜 쓴 걸까?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유도 아니고, 또 주장과 직접적 관련도 없어 보이는데?’ 글의 통일성을 알고 있는 학생이라면, ‘어?’하게 된다.

이러한 전략은 학생 개인과의 상호 작용을 할 때, 곧 피드백에도 사용한다. 하지만 이런 피드백을 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질문을 하려면 호기심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질문을 하려면, 그리고 질문을 잘하려면 교과서 글의 화제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학생들이 읽어야 하는 글들은 학생들이 잘 모르는 분야인 경우가 태반이다.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겨우 알았다 싶으면 다음 단원으로 넘어가야 하거나 혹은 시험이 끝난 뒤라서 흥미가 사라진 상태이다. 이 부분은 여전히 고민이지만, 어쨌든 질문에 학생들이 ‘어?’하게 되면 일단은 성공이다. 그리고 그 학생 수가 3분의 2가 넘으면, 교실은 다소 소란스럽게 되고, 이 소란스러움은 다른 학생들의 흥미를 이끌어 내는 자극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매년 학교에서는 공개 수업을 하는데, 교사는 자신이 참관한 수업에 대해 참관록을 써서 수업한 교사의 자기 연수의 자료로 삼게 한다. 내 수업 의도를 잘 읽어준, 감사한 참관록을 그대로 옮겨 본다.

∙ 차분한 반 분위기 속에서 글을 꼼꼼하게 읽고, 서로가 진행자가 되어 얘기하고 질문하는 모습이 진지하고 적극적이었음. ∙ 지난 시간 수업 불참으로 글을 읽지 못한 학생에게 다른 모둠원들이 학습지 질문의 답과 근거를 적는 동안 글을 읽게 함. 모둠원 모두의 참여를 위한 자율적 판단들을 학생들 스스로 해가는 모습임. ∙ 모둠원들끼리 얘기할 때 “그 생각의 근거가 뭐야? 그게 글 속 어떤 부분에 나와 있어?”라는 질문들을 서로에게 던져 근거를 글 속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음. 모둠원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바로 글을 읽을 때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고, 깊이 있게 읽는 모습의 반영인데, 실질적인 연습이 되고 있어 인상적이었음.

3. 새롭게 보기

나는 힘든 업무이지만, 학생들에게 뭔가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었고, 선생님들 추천으로 작년부터 2학년부장을 맡았다. 학년부장으로서 나는 주로 하위권 학생들을 돕고 싶었다. 나는 상위권 학생들은 이미 제도적으로 혜택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 학교의 예산이나 행정력의 많은 부분도 상위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다. 또 학생들도 알아서 한다. 이에 반해 중하위권, 특히 하위권 학생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소외되곤 한다. 이런 소외가 누적되어 고등학생이 되면 교사나 학생 모두 힘든 경우가 많다.

하위권 학생들 하면 어떤 반항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사실 그들이야말로 소위 고정 관념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질문의 가치를 인지시키고 싶었다. 좋은 질문은 세계에 대한 재구성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위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어?’하는 질문을 던지고, 이 질문에 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대해 질문하는 힘을 조금이라도 키우기를 바라는 뜻에서 ‘쓰기의 힘’을 계획했다.

‘쓰기의 힘’은 반두라의 ‘자기효능감’ 향상의 방법인 성공 경험, 관찰 학습과 강화를 이용해서, 학기 당 각각 7회(나누기 1회), 매주 방과후 1시간 동안 도서관에서 분량 제한 없이 주제별로 글을 쓰는 활동으로 계획했다. 처음에는 하위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모집했는데, 생기부에 반영된다고 하니 중상위권 학생들도 참여해서 2학년 학생의 40% 정도가 참여했다. 고무적이었던 것은 총 14회라는 적지 않은 횟수가 진행되어도 출석률이 꾸준하게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달콤한 간식도 한몫했다.

‘쓰기의 힘’을 운영하는 데에 가장 고민한 부분은 주제 선정이었다. 매번 다른 분야에서 학생들이 ‘어?’ 하는 반응을 유도할 수 있는, 학생들의 지식 구조에 작은 균열이라도 낼 수 있는 질문이어야 했다. 이 가운데에 몇 개만 소개한다. (학생들이 쓴 글을 복사해 놓지 않고 돌려준 터라, 학생들 글은 제시하지 못한다.)

∙ 감정과 생각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것을 아는 것은 당신의 삶에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 과학과 윤리(도덕)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힘이 셉니까?
∙ 사랑은 의무일 수 있습니까?
∙ 상속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세울 만한 가장 강력한 이유(근거)는 무엇입니까?
∙ 여행은 인류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우주여행을 통해 인류는 어떤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까?

올해는 1학기에는 ‘읽기의 힘’, 2학기에는 ‘쓰기의 힘’으로 나누었다. ‘읽기의 힘’ 역시 기본적 관점은 같았다. 그런데 좀 더 과감하게 실시했다. 「꽃들에게 희망을」책을 읽고 질문을 만들어보게 하기도 했지만, 태극기의 태극 형상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거나, 심지어 학교 도면이나 학교 앞 사거리의 거리 풍경, 어플로 50년 뒤의 자기 사진을 보여주고, 어떤 것이든 질문을 만들어보라는 방식이었다. 책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의 의미가 새롭게 해석될 수 있음을 경험해 보기를 꾀했다. 학교 도면을 보고 질문 만들기에 대한 학생 답변 몇 개를 소개한다.

∙ 창문의 크기를 각각 다르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 우리 학교의 디자인은 학생들을 배려하는가?
∙ 왜 아파트가 많은 곳에 지었을까?
∙ 학교 주위는 막아놨으면서 왜 중앙정원을 만들었을까?
∙ 장애인 화장실이 1층 구석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각 학급의 반이 일자로 나란히 있는 이유는?
∙ 학교를 지을 때 학생들의 어떤 모습을 생각하면서 설계했을까?

4. 질문이 만들어내는 가능성

질문이 있는 수업을 위해서 내 경우는 일단 교재 연구를 충실하게 하는 편이다. 교직 경력이 쌓인 지금은 교육과정이나 성취기준, 교과서 분석은 상대적으로 수월하지만, 그래도 나는 교재 연구를 충실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교과 교사로서 당연한 일일 수 있지만, 내가 교재 연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외에도 더 있다. 과거 권위주의적 시대의 교사 권위는 현재 남아 있기도 어렵고, 통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교육에 교사의 권위가 필요하다면, 나는 교사의 권위는 수업을 통해서 세워진다고 믿고 있다.

교재 연구를 할 때 염두에 두는 것은, 내가 아는 것과 학생의 이해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 역시 당연한 말이지만, 이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 사실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교사인 내가 아는 것이 기준이 되면, 잘 이해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으로 구분되지만, 학생의 이해가 중심이 되면, 자기들의 속도를 고려하는 교사와 그렇지 않은 교사들로 구분된다. 그리고 학생들은 자기들의 속도에 맞게 가르쳐주기를 원한다.

최근에 경험한 바이지만, 코로나 기간 3년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학생들의 학습 태도나 역량이 다른 것 같다. 중학교 3년 내내 집에서 컴퓨터로 공부한 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학생들과 여러모로 차이가 있다. 비단 코로나만은 아니다. 같은 학년이라고 해도 학교마다 수업 태도나 학습 역량이 다르다. 심지어 각 반마다도 다른 경우가 많다. 게다가 디지털 네이티브인 지금 세대의 가치관이나 감성도 나와 너무나 다르다. 사회문화적 배경 이외에도 경제적 환경까지 나와 다른 세대이다.

학생들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지금보다 훨씬 젊은 시절에 학생들과 잘 어울려 지냈지만, 과연 그 시절에 나는 학생들을 ‘이해’했는지 자문하면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어렵다. 학생들과 함께 수업 시간과 방과 후 시간, 심지어 방학 기간에 신문도 펴내고, 시집도 내고, 연극도 하고, 도서관 행사도 매주 하고, 전국적 토론대회도 데리고 다녔다. 정말 학생들과 후회 없이 지냈지만, 학생들과 지내기에는 지금이 훨씬 좋다. 지금은 학생을 좀 이해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수업뿐만 아니라 생활지도도 더 쉽다. 아마도 학생들과 함께 어울렸던 시간이, 그리고 틈틈이 읽었던 책들이 헛되지 않은 듯하다.

담임을 하다 보면 유독 눈이 많이 가는 학생들이 있다. 알아서 잘하는 학생들보다 그렇지 않아 보이는 학생들이다. 이런 학생들과는 일단 라포르(rapport)를 잘 형성하려고 노력한다. 가끔 영업비(?)도 쓴다. 일단 라포르가 형성이 되면 학생이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상담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상담을 한다고 해도 이래라 저래라 하지는 못한다. 내가 하는 것은 그런 선택이 가져올 결과들을 학생과 같이 좀 더 생각해 보는 것이다. 대화라고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나는 학생들의 생각에 질문을 하는 역할을 한다. 심지어 자퇴를 두고서도 무조건 자퇴는 안 된다고 말하는 대신, 자퇴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 질문한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부분들을 새롭게 이해하기도 하고, 학생 스스로 ‘더 생각해 볼게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결정은 학생 몫이다. 물론 내가 수긍이 되는 경우도 있다. 많지는 않지만, 그 경우는 그만큼 학생이 진지하게 많은 생각을 했다는 증거이다. 그럼 학생을 응원하는 수밖에 없다.(사실 학생이 자퇴를 하지 않는 것과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린 경험을 갖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어느 교사나 학생을 도우려는 입장이다. 나 역시 그러한 마음이다. 그렇다고 호혜적인 태도나 올바른 답을 알려준다는 태도를 갖지는 않는다. 사실 내 인생도 잘 못사는 처지에서, 고등학생을 상대한다고 내 말이 갑자기 올바른 답이 될 리는 없다. 그래서 나는 학생을 내 선입견으로 평가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유가 있겠거니 하는 태도로 일단은 지켜본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상담도 자주 하려고 노력한다. 복도를 함께 걸어가는 짧은 시간이 주어졌다면, 요즘 어떤지 물어본다.

작년에 담임 선생님이 적은 두툼한 상담 일지가 2권이 넘을 정도로, 여러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났고, 수업하시는 교과 선생님들도 몹시 힘들어 했던 반이 있었다. 나와 상담 교사까지 총동원이 되어야 했다. 밝히기 어려운 일이 있어 자세히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일 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였다. 올해는 모두 진급해서 수업을 통해서도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난봄 어느 날, 점심시간에 교정을 걷고 있었는데, 그 반이었던 학생 한 명이 내 옆으로 와서 같이 걷더니 말을 걸었다. 자기가 진로를 정했는데 잘 될 것 같은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진로를 위해 자기가 2학년 때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자랑처럼 말했다. 나는 당연히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이렇게 달라진 거야?’ 그 학생의 대답은 나에게 특별한 기억이다. ‘샘이요.’ (가끔 오가다 학생을 보게 되는데, 계획대로 잘 안되는 눈치다. 잘 이겨내길 바란다.)

5. 나오며

‘왜 수숫단일까?’ 질문에 답하다 보면, 「소나기」의 새로운 면이 보인다. 소년과 소녀가 처음 만난 장소는 개울가였다. 소녀는 개울 징검다리 중간에 앉아 있었고,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며칠 후 토요일, 다시 개울가에서 만난다. 이때 소녀는 개울가에 앉아 있고, 소년은 그 옆에 서 있다. 그리고 둘은 산 너머로 같이 동행한다. 그러다가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는다. 그리고 빗줄기가 눈앞을 막는다. 비안개 속으로 보이는 원두막으로 달려간다.

이러한 공간의 이동에서 소년과 소녀의 물리적 거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처음에는 개울 중간과 개울가 사이의 거리였지만, 어느 틈에 둘은 동행하고, 나란히 앉는다. 겨우 한 사람 정도가 들어가는 수숫단 공간은 이 둘의 거리를 더 좁힌다. 비를 맞는 소년에게 소녀는 수숫단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이 거리가 극적으로 좁아지는 지점이 도랑을 건널 때이다. 도랑을 뛰어 건널 수 없어서, 소년이 소녀를 업는다. 이때 도랑의 물이 차오르고, 소녀는 ‘어머나’ 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목을 끌어안는다. “개울가에 다다르기 전에, 가을 하늘이 언제 그랬는가 싶게 구름 한 점 없이 쪽빛으로 개어 있었다”

질문은 세계 구성을 새롭게 하는 중요한 계기이다. 나는 학생들이 질문을 통해 ‘주어진’ 세계 이해가 아니라, ‘창조적’ 세계를 전개해 나가기를 바란다. 안락한 지식 구조에 균열이 발생하면 고통스럽겠지만, 그 과정을 겪어내면 세계의 구성자로서,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다. 학생들이 질문의 가치를 이해하고 질문할 수 있기를 바라고 내 나름 노력하지만, 사실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다. 감히 이 매거진의 다른 선생님들의 글에 나란히 놓일 수 있을지 부끄럽다. 다행히 영특한 학생을 만나 내 방향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은 든다. 이 글을 중간 점검의 계기로 삼아 본다.

만들어진 답을 수동적으로 외우게 하는 주입식 교육의 현장 속에서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답을 만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자신이 만든 답을 친구들과 공유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답을 발표할 때면 선생님께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논리적 허점들을 날카롭게 질문하셨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선생님께서는 이 답변에서의 논리적 오류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등을 직접적으로 알려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질문을 통해 스스로 오류를 찾고 힌트를 제공함으로써 비판적 사고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역량을 가장 많이 키울 수 있었던 수업이었고 지금까지 해왔던 수업 중 논리와 언어에 주목할 수 있는 가장 ‘국어다운’ 수업이었습니다.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이 수업에서 논리적으로 내 답을 설계했던 경험이 대학교 면접 볼 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학급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최소화하셨습니다. 그 대신 학생 자치를 활성화하여 학생들이 직접 학급을 이끌어가는 데에 집중하셨습니다. 학생들을 관찰하여 가끔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직접적인 도움을 주시지만 기본적으로는 학생들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학생의 주도성을 기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가지고 있었던 관념적 틀을 깨고 사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질문은 사회적 당위라고 생각했던 것에 의문을 품고 논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셨고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회를 깨닫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려는 저를 교육학도로 이끈 은인이시기도 합니다. 정보의 홍수로 비판적 사고 능력이 중요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선생님의 교육 방식과 철학은 기존 교육의 한계점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김지형 선생님을 추천합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재학생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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