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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계 이슈이슈!

Love to Learn, Learn to Love

김지현 오현고등학교 교사
오현고등학교 교사 김지현

배우는 즐거움은 다함께

영어 과목은 사교육과 조기교육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큰 과목으로 여러 가지 영어교육 경험이 있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의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 학습을 대하는 자세가 아주 다릅니다. 일반고의 대입 수험생으로서 그저 끝없이 외워야 하는 압박감을 느끼는 어휘, 그것을 바탕으로 이해해야 하는 독해 지문은 어떤 학생에게는 막막한 암호문과도 같이 다가옵니다. 게다가 수능 시험에 나오는 경제학, 정치, 윤리학 등 원서에서 발췌된 내용으로 이루어진 난해한 문장들은 우리 학생들의 마음을 더욱 답답하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선생님들이라면 이런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입니다.
“선생님, 공부가 재미가 없어요. 재미가 있어야 공부를 할 텐데….”
그럼 학생들에게 말해줍니다.
“배워서 알아야 재미가 생긴다.”

어느 정도 재미와 호기심을 갖고 학습을 시작하는 것은 맞지만 내내 재미와 흥미를 갖고 갈 수는 없습니다. 배워서 알아가는 즐거움이 다시 배우게 만드는 것이며 이것은 알려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시켜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교육 현장에서 10년을 보내고 공교육 현장에서 다시 10년, TED 영상 번역 Language Coordinator로 5년 동안 활동하며 얻은 모든 노하우와 경험을 토대로 그동안 수많은 학생들의 학습의 시작, 과정, 결과를 보며 시작에서 머뭇거리는 학생들에게 알아가는 즐거움과 의미를 경험시켜주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TED 영상 번역으로 공부하는 STEDy English 프로그램, Holes 소설로 만화 그리기, 교과서 속 인물 인터뷰하기 등 다양한 콘텐츠를 수업 시간에 연결 지어 보았습니다. 역시 모든 학습에서 그렇듯 “The rich get richer, the poor get poorer.” 현상은 발생했습니다. 학습의 기본과 배경이 있는 학생은 더욱 진보하고 그렇지 않은 학생은 구경꾼이 되는 수업을 보면서 한 명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함께 배울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동기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평가의 방법을 활용해 배움의 즐거움과 성취감을 얻게 해줄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수업과 평가를 연결해 의미 있는 경험을 하게 해보자 생각했습니다.

이런 고민의 과정에는 교실 너머 동료 교사와의 공유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교사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도 동료 교사와 교실과 책상을 공유하는 순간 아이디어의 시너지 효과가 생길 수 있는데, 우리 학교에는 국어, 수학, 물리, 윤리, 역사, 영어. 사회 선생님들이 함께 모여 과목과 교실을 초월한 마음속 이야기와 고민을 나누는 수업 성찰 동아리가 있어 그곳에서 나눈 이야기를 다시 교실로 끌어올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하는 동료 영어 선생님의 격려와 협력으로 수업과 평가를 아우르는 "Autobiography Project: 자서전 만들기"를 기획하여 실행했습니다.

자서전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하다

기존의 평가를 수업에 녹이고 우리 학생들에게는 배움의 즐거움과 성취감을 얻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교과서 속 인물 이야기를 연장해 자서전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하였습니다. 영어와 친해지지 못한 학생, 영어 앞에 주눅 드는 학생, 매우 복잡한 한국어를 척척 말하면서도 언어 학습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학생, 영어를 잘하면서도 표현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학생들까지 아우를 수 있도록 한다는 생각으로 2주간에 걸친 자서전 만들기 프로젝트를 수업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다음과 같이 수업과 평가를 위한 개요를 만들어 세부 계획을 세웠습니다.

1. What is autobiography? - 자서전이란 무엇인가, 자서전의 종류, 예시
2. Survey - 준비 단계: 인생 설문 조사
   a) My interests
   b) My Bucket list
   c) Timeline
3. Planning – 계획 단계
4. Title & Cover - 제목 만들기, 표지 구상
5. Contents - 목차 정하기
6. Acknowledgement - 감사의 글
7. Timeline - 약력
8. Life Story I - 자신의 과거 삶의 이야기 요약하기
9. Life Story II - 다음 세 가지 이야기 중 선택하여 쓰기
   a) 고난/역경 극복/성취
   b)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
   c)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
10. 책으로 엮기

각각의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하였으며, 영어 실력이 부족하더라도 해낼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과 템플릿을 제공하였습니다. 먼저 학생들에게 앞으로 진행될 수업의 개요와 그 과정에서 진행될 수행평가에 대해 안내하는 수업으로 모든 학급에 들어가는 같은 학년 동료 영어교사가 협력하여 같은 내용으로 진행했습니다. 두 번째 Survey는 프로젝트 중 유일하게 개인적으로 집에서 해오도록 내준 과제였는데, 학생들의 인생을 간단하게 담아볼 수 있도록 하는 내용으로 내주었습니다. 기본적인 내용이 없이는 앞으로의 수업을 진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유 있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흥미로운 내용으로 구성하였습니다.

Autobiography Project

제출된 Bucket List에 들어 있는 각종 꿈과 바람들은 다양하기도 하면서 현재 십 대 학생들의 흐름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Survey는 빈칸에 나열식으로 쓰면 되었기 때문에 영어 문장 쓰기나 어법을 신경 쓰지 않고 얼마든지 스스로 인터넷이나 자료를 검색하여 쓸 수 있어 학생들은 자유롭게 채웠습니다. 정답을 맞혀야 하는 부담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 되는 것이라 그랬는지 안 낸 학생들이 거의 없이 제 때 제출한 유일한 수행평가였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Survey를 바탕으로 하나씩 풀어가는 것이었으며 모두 수업 시간에 또래 친구들과 선생님과 이야기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채워나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후에 진행될 내용을 배치하고 연결할 수 있도록 계획 단계를 통해 제목 만들기, 표지 디자인, 약력에 포함될 내용, 인생의 주요한 사항들, 감사의 글에 포함할 사람들을 하나씩 차례로 계획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아무리 수업을 철저히 계획해도 의도대로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계획이 있으므로 이루어야 하는 최소한의 결실은 담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중 하나는 우리 학생들도 무언가 기획할 때 계획을 세우면서 실행해 보는 것을 은연중에 배웠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Autobiography Project

Acknowledgment 부분은 fill-in-the-blank (빈칸 채우기 방식) 형태의 글로 이루어져 있어 주된 문장의 틀은 주어진 상태에서 자신의 감사하는 대상과 감사의 이유를 간단히 써넣을 수 있는 형식이었습니다.

Acknowledgment

아직은 전체 문장을 쓰지는 않는 형식이라 학생들이 시도해 볼 수 있는 단계였습니다. 그러나 Life Story 단계에서는 에세이 형태로 글을 써야 해서 난이도가 올라가 도전적인 단계가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단어부터 시작해서 표현을 어느 정도 익혀온 터라 영어 실력이 부족한 아이들도 표현들을 조합하여 문장으로 만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Survey와 감사의 글, 약력들을 토대로 이야기의 얼개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과정에서 학생과 교사가 서로 묻고 답해 주며 협력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은 역시 서로 마음을 열고 알고 싶은 표현, 문장 구조, 알고 있는 내용을 공유하며 서로 다른 자신만의 자서전을 완성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쉬운 표현이라도 영어로 자꾸 쓰지 않으면 모르는 여러 가지 표현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히는 효과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평가하면 점수를 어떻게 부여할지 고민이 되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수행평가의 비율을 적절히 분배하고 각각의 단계를 세분화해서 채점하여 적어도 한 영역 이상은 모든 학생이 만점을 받을 수 있어 자신이 공들여 진행한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노력한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어느새 수행평가에 반영된다는 결과적인 것보다는 각각의 내용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친구는 표지 디자인에 공을 들이고,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적성인 친구는 자신의 약력을 연도별로 나누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가장 첫 단계의 과제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수업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다 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씩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진솔하게 풀어내는 10대 소년들의 인생이야기는 소박하면서도 깊고, 밝으면서도 각각의 아픔과 고민이 가득했습니다. 채점하기 위해 Life Story를 읽으며 가슴 찡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겉으로만 봐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며 함께 점검했던 동료 선생님과 감탄하기도 하고, 또 한편 학생들의 진지한 태도에 감동하기도 하였습니다.

My life

왜 함께여야 할까

처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알렸을 때 자신은 영어로 글을 읽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영어 쓰기를 할 수 있겠느냐며 불안과 걱정을 털어놓은 학생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사교육도 받지 않고 과제를 봐줄 과외선생님이나 가족도 없는데 자신은 어떻게 하냐는 하소연이 저에게는 더욱더 이 프로젝트를 해야 한다는, 그래서 그런 학생들이 스스로 해낼 수 있게 만들어 줘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습니다. 모든 과정에서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길을 제공하고, 또 할 수 없을 때는 학생들이 서로가 Peer Learning을 통해 선생님이 되어 다 같이 해내도록 하였습니다. 실제로 자서전은 모두가 다른 내용이라 함께 묻고 이야기하면서 만들어 가는 과정이 더욱 의미 있고 활기가 있었습니다. 잠자거나 게을리하는 학생들이 없었고, 모르는 것이 있어도 불안해하지 않았으며, 친구가 경쟁자가 아니라 협력자였습니다. 물론 이렇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 모든 과정에 선생님의 고생과 노력이 필연적이었습니다. 각 단계에서 학생들이 느낄 어려움의 정도와 성취할 수 있는 정도를 가늠하고 그에 따라 내용을 구성해야 했으며, 각 단계를 마치고 나면 결과물을 모아 하나씩 꼼꼼히 교차 점검하고 채점했습니다. 선생님의 진정성을 학생들이 알아주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진정성 있는 자세로 서로 보답해주는 듯했습니다.

한 학생은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 선수 생활을 해서 제대로 영어 학습이란 것을 한 적이 없는 체육 특기생이었습니다. 이 학생에게는 영어로 한 문장 이상 쓰는 것은 그야말로 커다란 학습의 도전이었습니다. 당연히 영어로 쓰기를 하기 위해서는 주변 친구, 교사의 도움이 필연적이었습니다. 당시 짝이었던 친구는 최상위권 성적을 갖고 있던 학생으로 자기 작품을 만들면서도 그 친구를 성의껏 도우며 함께 이야기하며 완성해 나가는 훈훈한 모습이 내용에도 반영되었습니다.

My life

아이들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최대한 영어 표현을 찾아서 쓰며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와 삶의 고통과 슬픔, 사랑도 가감 없이 풀어내었습니다. 오히려 영어로 더욱 속마음을 잘 표현하는 것 같았습니다. 동료 교사와의 협력으로 전체 학생이 참여하여 480명의 480가지 자서전이 탄생하였습니다. 모든 과정을 마친 후에는 내용을 책으로 엮어 친구들의 자서전을 전시해서 공유했습니다.

자서전 전시

학생들에게 배움과 학습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은 수업 기법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대하는 자세나 관점을 갖게 해줌으로 스스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한 교실에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모양의 책상에 앉아 비슷한 모습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너무도 다채로운 학생들은 기회만 있다면 마음을 열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오히려 제가 몰라줬던 것이 아니었나 반성해 보았습니다. 십 대 학생들은 하루 시간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냅니다. 일반고 고등학생의 경우에는 어떤 경우 가족과 있는 시간보다 친구들, 선생님들과 함께 수업 시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학생들이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선생님의 존재 의미도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며 우리 학생들이 배움의 의미와 즐거움을 알게 되면 계속해서 배움을 찾게 될 거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교실 문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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