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공, 나의 진로
공포감에서 벗어나, 내면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길
여의도에 있는 K본부와 M본부는 지나가다 본 적이 있지만, S본부를 가는 것은 기자에게 처음이었다. 바삐 걸음을 재촉하며 한편으로는 혹 연예인을 보는 것은 아닐까 설레는 마음을 작게나마 품으며 약속장소로 향했다. 방송국 건물을 나올 때까지 계속 눈을 열심히 굴렸지만(기자는 인터뷰에 열심히 집중했다. 정말이다!) 끝날 때까지 연예인 머리카락도 볼 수 없었다.(한숨) 인터뷰는 보통 기자가 감사인사를 전하며 시작했는데, 감사하게도 선배님께서 먼저 말을 걸어주셨다.
요즘은 학교에 지방 사람들 많이 없지 않나? 나는 88학번이거든? 처음에 학교 왔을 때 경상도 사투리가 꽤 많이 들리더라고. 반이 넘게 그쪽 출신이었으니까. 지금은 수도권 출신이 더 많은 것 같아. 오늘 어떤 내용을 말해야 하려나? 학생들한테 ‘어떻게 하면 서울대 갈까?’ 이런 게 궁금하려나?(웃음)
(웃음)일단, 시간 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연말인데 안 바쁘신가요?
‘연말이라서 꼭 바쁘다.’ 뭐 이런 것은 아니고 바쁠 때 바쁘고, 아닐 땐 아니고 그래. 지금은 안 바쁠 때지.
보통 ‘PD’라고 하면 연출을 하는 분들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드라마 기획’ PD는 어떤 일을 하나요?
드라마 기획이라는 것은, 여러 작품 중에서 어떤 작품으로 시작할까 고민하는 역할을 해. 연출은 시청자로 하여금 보고 들을 수 있게, 즉 오디오-비주얼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지. 연기를 조율하고, 카메라 각도를 결정하고, 어떤 음악이 어떤 시점에서 어떻게 분위기를 결정하게 할지 등을 말하는 거야. 연출하는 사람은 글로 쓰인 작품을 보고, 해석하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재미있고 긴장감 있게 그려낼 줄 알아야해. 그런데 이런 일에 앞서서 중요한 건 작품 자체가 일단 좋아야 연출을 잘 하고 시청자도 재밌게 볼 수 있어. 그래서 좋은 드라마를 결정하고 그 작품으로 시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해. 바로 그런 것을 결정하는 것이 기획 PD의 역할이야. 기획하는 사람에게는 유능한 작가를 찾아내고 작품을 보고 판단하는 능력, 좋은 작품을 골라내는 능력이 필요하지.
그렇다면 동료분들과 같이 작품을 읽고 하시겠네요.
응. 여러 명이서 같이 해. 우리는 주로 읽는 일을 하지. 어떤 작품을 여러 사람이 받아 보고, 각자 판단해서 의견을 이야기하는 과정을 거쳐서 본부장님이 결정하는 방식을 일이 진행되지.
지금은 방송국에서 근무하시지만, 졸업은 경제학부에서 하셨어요.
사실 대학교 3학년 때까지 재경직 행정고시를 생각하고 경제 쪽 의사결정을 하는 공무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가 고시공부를 하면서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은 그게 아닌 것 같더라고. 그래서 1차 합격을 한 상태에서 다 놓아버렸지. 원래 그림 그리고 하는 게 취미였고, 영화나 애니메이션도 재미있게 봐 와서 애니메이션 제작이나 영화 연출을 하고 싶더라고. 그 전까지 행시 관련 수업만 듣다가 그때부터는 미술대학이나 언론정보학과 가서 수업 듣고, 애니메이션 제작이나 영화 연출 관련 수업을 찾아들었지.
그리고 졸업한 다음 바로 여기에 취직하신건가요?
아니, 공군장교로 근무했어. 왜 그랬냐면, 그 전까지 경제학이나 글 쓰는 공부만 했잖아. 원래 내 취미는 그림 그리고 하는 건데, 다시 상상력을 가다듬고 키워야겠다 싶어서. 거기서 시간도 있고 월급도 받으니, 그런 점을 이용해서 연출 쪽 공부를 해보려고 했지. 일단은 사진 찍고 암실 차려서 인화도 하고 했어. 좋아하는 영화가 있었는데, 시각적인 부분에 굉장히 감탄을 해서 시각적인 상상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고, 사진을 공부했지. 시각적인 상상력을 키우려고 영화의 느낌을 따라 하기도 하고, 밤중에 나가서도 찍어 보고, 배색을 공부하기도 하고, 여러 렌즈도 이용해보기도 했지. 그런데 사실 영화는 사진과 조금은 다르거든. 그래서 연출을 배워봐야겠다 해서 방송국에 지원을 했지. 나는 여기 입사 면접할 때 이야기했어. ‘나는 연출할거다, 작품할거다. 이러 이러한 노력을 해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면접 평가가 괜찮았더라고. 막 당장이라도 내 일 바로 할 듯 얘기하니까.(웃음) 당시 필기는 급히 준비해서 간신히 통과했고, 면접에서 두드러진 케이스였다고 들었어.
그리고 지금은 기획 쪽에서 근무하시고 계시네요.
드라마 연출하며 배워봐야겠다고 생각해서 들어왔지만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입사한 것이지. 기획과 연출의 차이도 잘 몰랐고. 처음에 들어와서는 편성본부에서 일했어. 드라마 연출로 지원했지만, 입사해서는 전체를 파악하고 전반적인 일을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편성본부로 갔어. 그 다음 지금 기획 자리로 옮겨서 일 하고 있는 거지.

학창 시절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아까 졸업 이후 방송국에 입사하기까지의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대학 입학할 때 경제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는 뭐였나요?
모르고 한 거야. 내가 전공을 선택할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할지 알았더라면 그렇게 안 했을 거야. 지금도 다른 일 하잖아? 성적이 갑자기 잘나왔어 고등학교 후반 즈음에. 그 때 수학하고 미술을 좋아했는데 문과에서 경제학이 수학을 그나마 많이 하니 전공한 거지 뭐.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88학번이시면, 그 때는 시대적인 배경이 공부만 하고 있기에 어려운 때였잖아요?
그 때는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던 선배들하고 책도 읽고 세미나도 하고 그랬지. 나는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았어. 사람하고 어울리는 게 불편하기도 했고 무섭고, 겁나고…. 1학년 때는 다른 동기들이 모두 간다고 해서 시위도 따라 갔는데 판단이 잘 서지 않기도 했어. 부끄러운 얘기지만, 난 그 시절 사회문제의 심각성을 잘 몰랐어. 단순히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될 거라 생각했고 고등학교 때 하던 것처럼 말이지. 대학생활? 음, 크게 재미있지는 않았어. 3학년 때까지 고시공부를 했다고 했잖아. 동아리에 가입했지만 열심히 하진 못했고 그 때는 그런 것 보다 조인트 동문회라는 게 있었는데 중앙고하고 창덕여고하고 같이 동문회를 했어. 거기서 받는 정서적 위안이 좋았던 것 같아. 그 외에는 그냥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뭐랄까, 공포감이 나로 하여금 공부해야겠다고 하도록 했어. ‘내가 잘못하면 나중에 변변찮게 살 것 같다.’ 라는 식의 공포감 말이지. 사람한테 이런 걱정이 들기 시작하면 ‘이것을 해야 할 텐데 그래야 돈 잘 벌 텐데.’라는 생각을 가지게 돼. 사실 내가 잘하는 것 또는 좋아하는 것을 모두 제치고 ‘나를 비싸게 팔 수 있을 것 같은’ 공부를 하다 보면 재미도 없고 성과도 나지 않아.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무시하면서 살다보면 허전하고 불쾌함이 누적되고 분노와 원망도 싹트고 그래서 정신적으로도 어렵게 되더라고. 다 내가 경험한 이야기지만, 이게 아마도 지금 많은 학생들이 동일하게 겪는 상황이 아닐까 싶어.
자꾸만 현실적으로 보게 되니까,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많이들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아요.
‘나는 뭘 하고 싶지? 뭘 하면서 살까?’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내 마음을 알아야 하잖아? 나의 외부에서 답을 찾을 수는 없어. 사람마다 좋아하는 게 다르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에 공포감이 개입하면 내 마음을 살피는 일은 뒷전으로 미룬 채 공부만 하게 되는 것이지. 그 공부란 것이 율곡이나 뉴튼이 한 그런 공부가 아니라, 내키지 않지만 필요해서 하는 공부야. 즉 돈 되고 출세하는 데 필요한 공부인데. 그런 공부를 열심히 해도 공포감이 사라지지는 않았어. 이런 짓이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는 채로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몸도 마음도 바쁘기만 하고…. 그러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면 무엇하나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되어있고. 결국 대학교 3학년 때 한계상황에 부딪혔고 그제서 이건 아니라는 걸 느꼈어.
사실 이건 ‘감수성’의 문제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것인가, 공포감에 휘둘려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 말이지. 내가 하는 기획이라는 것도 감수성의 문제야. 기획안을 읽었을 때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여러 감정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야 기획을 잘 할 수 있어. 내면에 대한 감수성, 다시 말해서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느끼는 지 아는 것에 대한 정도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데, 나처럼 공포감에 휘둘려 살아온 사람들은 그런 감수성이 둔감해. 오히려 감수성을 거부하는 관성이 더 크지.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거부와 공포의 관성을 벗어나기까지 30년이 걸린 것 같아. 30년이라면, 이 나이 먹도록 여전하다는 거야.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그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입식 교육으로 정신이 멍해지게 되는 사회구조 상, 개인이 그 관성을 거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누군가 도와주거나 알려줘야 비로소 알 수 있는데, 물고기가 물을 인식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겠지.
아마도 이 인터뷰를 학생들이 읽게 될 텐데, 선배님께서 교육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방금 전 말씀도 그렇고, 자제분들이 홈스쿨링을 한다고 전해 들었거든요.
직전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공포감에서 벗어나기를 권하고 싶어. 자연, 야생에서의 공포감은 자신을 보호하는 실용적인 감정일 수 있어. 하지만 문명세계에서의 공포감, 특히 ‘돈을 많아 벌어야 한다!’라는 것으로 요약되는 그런 공포감은 논리적으로 합당한 결론이 아니라 무작정 그렇다는 마치 종교적 신념과도 같아. 무작정 믿고 보는 건데, 바보 같은 짓이야. 공포감 때문에 분비되는 호르몬은 몸을 해치고 공포감에 사로잡히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이지. 학생들이 흔히 말하는 대학의 서열은 결국 ‘그 학교를 졸업했을 때의 평균 월급이 얼마인지.’로 결정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만큼 지금은 돈을 버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게 되었고 학력에 따른 임금격차가 곧 공포감으로 이어지고 있지. 이렇게 공포감이 마음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 나처럼 돼버려.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하겠다.’가 아니라 ‘돈 잘 버는 직장에 취직하겠다.’가 되는 거야.
그런데, 사람이 정말 잘하는 것을 놔두고 돈 될 일만 쫓아다니면 얼마나 잘하고 잘 될까? 잘 하는 것을 하는 사람하고 돈을 목적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비교하면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의 차이가 분명히 있겠지. 세상의 다양한 분야에서 필요한 것이 있는데, 다들 돈 될 만한 것만 쫓아다니다 보면, 결국에는 무엇 하나 제대로 못하는 사람만 가득하게 되겠지. 모든 산업 영역에 그런 사람들만 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어떡하나 싶어….
주변에서는 이렇게 얘기하기도 해. ‘행복해지기 위해서 돈을 잘 벌어야 하는 거야.’ 돈이 많으면 행복해진다? 정확히 하자고. 돈이 너무 없으면 비참하니까 행복해지기 어려울 테니 그런 정도를 벗어나라는 말은 맞아. 하지만, ‘행복해지는 것’은 다른 얘기야. 좋아하는 것을 해야 행복할 텐데, 크게 3가지 경우일 거야. 첫째는 그 일에 ‘몰입’할 수 있을 때, 둘째는 사람들과 서로 ‘공감’할 수 있을 때, 셋째는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 즉 종교적 가치, 정치적 가치, 또는 인권 같은 가치 등을 추구할 수 있을 때가 그래. 이 세 가지는 돈과 관련이 없어.
공포감에서 벗어나서 좋아하는 일을 하라. 앞서 말했던 거부와 공포의 관성을 벗어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하라고 권하고 싶어. 스스로 어떨 때 행복해지는지 생각하고 명상하며 감수성을 키웠으면 하고.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 조상들이 해오던 좋은 정신적 전통이 많아. 아까 얘기한 몰입, 공감, 가치 추구의 문제는 정신적인 문제인데 이런 것들을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는 감수성이 필요할 거야. 우리 선조들은 전통적으로 마음을 정교하게 따져보는 연습을 많이 하셨거든. 여러 유학자들도 그랬고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성불도 같은 맥락에 있고. 그런데 그 전통이 어느 순간 ‘그게 돈 벌어주나? 밥 먹여 주나?’ 라는 말에 무너져버렸지. 때로는 ‘너무 정신적인 걸 추구하면 돈을 많이 못 벌어!’라고까지 말하기도 해. 사실 그런 생각은 옳지 않아.
세계의 많은 리더들이 유태인인데 그들은 어릴 때부터 다분히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 꾸준히 고민해. 존중, 자선, 헌신, 선(善) 등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견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훈련하지. 실제로 학생들이 배우는 상당한 부분이 토론이나 생각하는 활동으로 이루어졌고 실제 우리가 으레 생각하는 ‘공부’는 시기적으로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루어져. 왜 그게 가능할까? 정신적인 수준이 뒷받침되니까 그럴 수 있어.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유태인의 예를 든 이유는, "높은 정신세계를 지향한다고 비참하게, 실패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사회 전체 차원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고, "높은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번다."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야. 그보다는 “적게 벌더라도 나는 높은 정신세계를 지향하면서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면서 한 말이라고 들어주면 좋겠어
아무튼, 스스로 행복을 찾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길 권하고, 정신적인 영역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어. 유태인으로 예를 들어 말했지만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논어와 같은 책들이나 독립운동을 하신 멋있는 우리의 선조들의 이야기를 쉽게 구할 수 있어. 높은 수준의 정신세계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내면에 감수성을 키우라는 거지.

식상한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현실과 맞물려 많이 충돌하는 지점도 많을 것 같아요.
높은 수준의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문제야. 대기업 정규직이 되는 데 실패하면,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으니까. 우리나라 여건이 유독 심해. 그런데, 여건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거야. 우리나라의 소득 양극화가 지금처럼 심해진 이유 중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 성장’만을 간절히 원하고 그걸 성취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기 때문이야. ‘정신의 성장’을 간절히 원하지는 않았어. 그 결과 지금은 자살률, 이혼율, 소득 양극화 등의 지표에서 우리나라가 높은 순위를 달성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런데 만약, 서울대에 입학할 정도로 ‘시험을 잘 보는’ 사람들이 ‘정신의 성장을 위해 노력’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런 사람들이 공무원이 되고 언론인이 되고 법관이 된다면? 아마도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의 정신을 바꾸는 일이 가능해질 거야. 내가 하는 일을 예로 들어볼까? 소위 ‘막장 드라마’를 만들지 않으면 방송사가 망하는 방송계의 현실은 대통령 혼자서 만드는 게 아니야. 수많은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와 사회적 방관, 무관심 등의 산물이지. 높은 수준의 정신을 추구하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많아진다면, 우리나라의 방송제도는 달라지고, ‘막장 드라마’가 사라지겠지. 달라지는 게 방송 현실뿐이겠어. 급여나 고용, 주거에 대한 제도도 달라질 거야. 그렇게 되면 제도뿐만 아니라, 우리가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달라질 거야. 다친 사람, 외로운 사람, 아픈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않고 고쳐주고 위로해줄 테니까,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마음이 편하고, 무슨 일을 직업으로 택해도, 무슨 전공을 택해서 공부해도 겁나지가 않겠지. 먼저 꿈꿔야 하지 않을까 싶어.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높은 정신세계를 추구하며 사는 모습을. 그런 모습을 꿈꾸고, 자꾸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그런 사회에 살게 되지 않을까?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네요. 다시 드라마 얘기를 해볼까 해요. 드라마 작품을 선정하는 위치에 있는 분으로써, 사명감 있다면요.
드라마가 가지는 사회적 영향력이 있어. 윤리의 문제인데 주위 사람한테 이런 질문을 해본다고 가정해봐. ‘조폭과 경찰 중에 누가 더 의리가 있을까?’ 많이들 조폭이라고 대답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조폭을 본 적이 없어. 드라마나 영화로 봤겠지. 사실 작품에서 그렇게 그려내는 것은 경찰보다도 더 의리 있는 조폭을 보여주면, 의리의 의미가 좀 더 실감나게 전달되기 때문인데 저런 대답은 작품의 의도하고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지. 이런 것을 ‘스테레오타이핑(stereotyping)’이라고 해. ‘까칠한 남자가 매력이 있다.’든지, ‘재벌 2세에게 상처도 있고,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는 등의 인식이 잘 알려진 예시야. 특정 직업이나 연령과 관련해 시청자들의 뇌리에 일정한 편견이 심어진다면 드라마가 잘못하고 있는 거겠지. 드라마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바람직한 일, 좋은 일을 드라마의 캐릭터로 보여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최근 방송하는 <오만과 편견>, <피노키오>, <너의 목소리가 들려> 같은 드라마에서 검사, 기자, 변호사라는 직업이 나오는데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 어떤 사명감을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면서, 모든 직업 있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 사회가 함께 공유하도록 하는 거지.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도 드라마 기획 업무를 하시면서 바라는 것이 있으시다면 한말씀 해주세요.
한마디로 사회 전체가 상벌과 무관하게 바른 행동을 하도록 즉, 정신적으로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설교가 아니라 재미있고 세련된 방식으로 말이야.
인터뷰를 준비하며, 대학 때의 전공과 어떻게 보면 전혀 다른 길을 걷고 계신 선배님께 많은 궁금증을 품고 갔었다. 학교생활 때 겪었던 고민과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해주셔서 감사히 인터뷰 정리를 매끄럽게 할 수 있었다. 솔직한 선배님의 말씀을 들으며 여러 차례 먹먹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라는 말씀이 인터뷰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 한편에 무거운 숙제로 자리잡고 있었다. 내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디시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큰 감동에 비해 한참 부족한 기자의 글 솜씨가 선배님의 말씀을 잘 전달하고 있을지…. 부끄럽지만, 부디 독자들은 잘 헤아려 주시길 부탁드린다. 끝으로 난처한 사진 촬영 부탁에도 적극적으로 좋은 자리를 찾아주시며 도와주신 선배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