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공, 나의 진로
법, 그리고 법 너머의 이야기
방공호에 갇힌 어른들, 법이란
어린 아이가 시체의 길을 건너
썩은 감자를 주웠을 때 생각한 것
법, 그것은 고작 단 한 번의 망치질로
법들이 쏟아져나올 때 되물었던 유일한 것
법, 그것은 교도소에 갇힌 죄인들, 그러나
부서진 삶은 모르네 사는 법을
무슨 이유에선가 사람들은 법전을 펴는데
한 아이는 감자밭 앞에서 법 사색을 하고 있었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국제형사재판소 소장,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을 지내오신 송상현 선배님께 ‘법’ 이야기를, 그리고 ‘법 너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959년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셨습니다. 법과대학 진학을 결심하셨던 계기가 있나요?
지금은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 로스쿨을 가서 법학을 전공하지만, 옛날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법과대학을 진학했죠. 그때 보통 사람들이 법학이라는 게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팔방미인 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실용학문분야라고 생각했었죠. 나는 법과대학을 가서 사법시험을 봐가지고 판사가 돼서 뭘 하겠다는 그런 요란한 계획은 없었어요. 다만 특별한 전공이나 소질이 발견이 안 되었는데, 대학을 졸업해서 어디 취직이라도 해서 생활책임을 지게 되는 경우에는 그래도 법과를 가야 써먹을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조금 있었어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나도 그걸 해. 왜냐하면 내가 무녀 독남이에요. 다 생활책임을 내가 져야 해. 그래서 세속적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렇군요. 예전만큼은 아니겠지만, 지금도 법학이 그렇게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동기가 하나 있었고, 이 외에도 두 가지, 남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동기가 있었어요. 하나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6·25가 났거든요. 피난을 못 가고, 공산당이 점령한 3개월을 서울에서, 지하 방공호에 숨어서 보냈거든요. 내 어머니나 아버님은 붙들리기만 하면 군대로 끌려가거나 징용으로 끌려갈 수 있는 나이셨고, 나는 열 살이었지요. 그렇지만 기본적인 어린이로서의 눈치는 있었어요. 그러니까 어른들은 다 방공호 속에 숨고, 나만 매일 고향으로 걸어가 식량을 얻어왔어요. 그런데 쌀이나 보리 같은 건 아무나 안 줘요. 여름이라 그런지 감자, 가지, 애호박, 이런 걸 줘요. 그러면 그걸 짊어지고 오는 거야. 내가 그걸 무사히 가지고 와야 방공호에 숨어 있는 식구들의 식사가 되거든요. 그걸 석 달을 했어요.
그 와중에 다니다 보면 길거리에 시체가 즐비해요. 6·25니까 여름이잖아. 굉장히 더울 때. 그러니까 시체가 막 썩어가지고 악취가 진동을 해요. 수백 구의 시체가 길바닥에 널브러져서 썩어가는 걸 봤지요. 냄새 때문에 코를 싸쥐곤 갔다 왔다 했죠. 그걸 어린 나이에 경험했으니 엄청난 충격으로 왔어요.
정말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그렇다고 먹을 것을 언제나 잘 얻어가지고 온 건 아냐. 북한군들이 나 같은 조그만 애를 붙들어가지고 배낭 속에 뭐 있는지 뒤졌어요. 어떨 때는 다 빼앗고, 어떨 때는 그냥 보내주고. 가끔은 배낭을 메고 걸어오는 동안에 미군이 공산군이랑 전투하기도 했거든. B29라는 폭격기가 하늘에 떠가지고 폭탄을 떨어뜨려요. 그러면 지상에 있는 북한군들은 자기가 가진 소총을 하늘에 대고, 그 비행기를 맞추겠답시고 쏴대요. 어림도 없는 거지. 폭탄이 떨어지고 총소리가 막 나니까, 북한군들이 우선 자기부터 살아야겠다고, 길옆에 있는 하수구에다 얼굴만 박아 넣어. 그렇게 난리를 치는 동안에 내가 얻은 식료품이 다 어디로 없어지기도 했지요. 그러면 그날은 십상 굶는 날이고요.
그런 전쟁 경험을 했는데, 너무 큰 충격으로 남았어요. 늘 머릿속에서 사람이 꼭 전쟁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뭐냐, 이렇게 피해가 나고, 이렇게 무고한 양민들이 죽고 다치는데 꼭 전쟁을 해야 되냐,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 수는 없나. 어려서부터 이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됐어요.
그런 생각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오면서 조금씩 정리됐지요.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지는 않은 것 같았어요. 법으로 잘 규제해서 전쟁을 예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내가 법과대학에 가야 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을 했고. 그게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지.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게 법과대학 진학을 하는 데에 한 요인이 됐던 것 같아요.
아까 말씀하셨던, 법과대학 진학의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 고등학교 때 일이에요. 설에 집안 어른들한테 세배 가는 건 누구나 똑같잖아. 그 당시에는 학생들한테서 상당히 알려진, 인기도 있고 존경도 받는, 그런 학자나 선생님, 지도자 같은 분들이 계셨는데. 학생들이 그런 분들께도 세배를 갔어요. 그때 내가 그런 분으로서 찾아가서 세배를 했던 분은 고려대학교 교수셨던 김상협 선생이지. 그분 댁에 세배를 갔어요. 그런데 이분이 인기가 많아서 그런지, 집이 터져나갈 정도로 학생들이고 졸업생이고 엄청나게 많이 오는 거야. 그렇게 정신이 없는데도 내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세배를 하면, 그 바쁜 와중에 나를 딱 붙잡아서 서재로 데려가서 단 둘이 앉아가지고, 매년 나한테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한 마디씩 해주셨어요.
그 중에 들은 얘기가 하나가 있는데, 한국은 반도다. 삼면이 바다다. 그래서 한국이 바깥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이 바다로 진출해서 해양강국이 될 수도 있는 거야. 북쪽은 공산당이 꽉 막고 있지만, 이쪽 바다가 삼면이니까, 열심히 해양진출을 해야 한다는 거지. 그러니까 한국은 물건도 많이 수출하고, 해양에 관한 여러 가지 사업도 하면서 바다로 진출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어요,
그 부분은 저도 많이 공감됩니다.
해양진출의 필요성을 굉장히 강조하시면서 나더러는 법과대학을 가라는 거야. 해상운송과 관련해서 해상기업활동, 이런 걸 규제하는 법이 우리나라 상법전의 제5편 해상편이거든. 해상편은 해상기업활동을 규제하는 기본적인 법체계에요. 또 선박이 바다를 종횡무진 남의 나라 해안선을 넘으며 왔다갔다 하는 걸 규율하는 법은 해양국제법이고요. 그러므로 해상기업활동, 즉 해상영리활동을 규제하는 상법과 해저를 개발하고 해상에서 선박이 국제적으로 항행하는 관계를 규율하는 해양법, 이 두 개의 법체계를 전부 다 아울러 더 커다란, 바다에 관한 단일 법체계를 한 번 구상해보라고 내게 말씀해주신 거예요. 법과대학을 가서 바다에 관한 법체계를 구축하는 꿈을 가져보라는 말씀이었는데,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쪼그맸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그랬어요. 나한테 아주 심각한, 도움 되는 말씀을 해주셨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요. 그런데 법과대학을 가라는 이야기는 머리에 남은 거야. 그게 또 계기가 됐지요. 그 때의 그 값진 충고, 전쟁 경험, 그리고 세속적인 이유까지. 이런 것들이 내가 법과대학 진학을 결정한 이유예요.
대학교에 입학하셨을 때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두 가지 있었지요. 첫째는 영어를 잘 배우는 거였고, 그 다음엔 한문을 좀 제대로 배우고 싶었어요. 영어하고 한문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겠나 물색해봤어요.
영어하고 한문을 배우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나요?
영어는 말이지, 내가 전국을 다 돌아다면서 피난하고 그랬잖아. 그 당시에는 초등학교 학생한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 없었어요. 중학교 들어가야 ABCD 하고 영어를 가르치지. 초중등학교에 다닐 때 애들이 미군부대에 왔다갔다 하고 껌이나 초코렛을 얻어먹으면서 할로우 어쩌구 하는 게, 나한텐 굉장히 영어를 잘하는 것처럼 들리고 너무 부러운 거야. 그래서 나도 대학 들어가고 시간이 나면 영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겠다고 결심했지요. 그런 생각은 초등학교 때부터 쭉 가지고 있었어요.
한문은, 내가 어릴 때 상당히 깊은 수준까지 한문을 가르쳐주시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거든. 그렇게 한문을 손에서 놓고서 많이 까먹었는데, 한 10년이 지난 다음에 생각해봤지요. 그 당시 내가 투자했던 시간이 아쉬운데, 다시 누구한테 배우면, 남과의 경쟁에서 내가 한 차원 더 우위를 얻는 거잖아. 한국어를 하면서 한문 배경을 몰라서는 안 되니까. 그래서 한문을 하고 싶었지요.
어린 시절 선배님의 독서 생활이 궁금합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지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급속히 발전하면서 크는 기간이거든요. 그러니까 책을 많이 읽어서 그쪽으로 채워줘야 한다는 게 우리 집 분위기였어요. 나도 그게 자연히 세뇌되었는지 동조를 하게 됐어요. 그래서 어떻게 읽느냐 하면, 침대 머리에 책 보던 게 있고,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 가면 책이 하나 놓여 있고, 공부방의 책상 위에 책 하나 접혀서 놓여 있고, 사방에 책은 다 있었어요. 아무 때나 보면 돼요.
그러면 책을 어떻게 읽느냐. 우선 정독을 할 필요는 없고, 다독을 했어요. 많이 읽어라, 그러면 기억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있지만, 남는 것도 있으니까요.
주로 어떤 책을 읽으셨나요?
위인전을 많이 봤지요. 세상을 리드해가는 한 인물이 어떻게 태어나서, 커서, 어떤 계기가 있어서 세계를, 혹은 한국을 이끌어가는 인물이 되었나 본 거야.
그 다음엔 스케일이 큰 소설. 예를 들면 ‘전쟁과 평화’ 같은 거. ‘삼국지’ 같은 거. 그런 건 진짜 스케일이 크지. 개인이 수필이라고 쓴 것들은 그냥 말초신경적인 재미는 있어도 결국은 신변잡기 같은 거에 불과했어요. 그런 건 읽지 않았고, 스케일이 큰 소설, 논픽션 같은 거 봤지요.
1962년도에 행정고시, 1963년도에 사법고시를 합격하셨습니다. 그렇게나 어려운 시험들을, 굳이 두 번이나 치르신 이유가 있나요?
나는 국가고시에 합격해서 관(官)으로 나간다든지 벼슬을 한다든지, 그런 거엔 전혀 관심이 없는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우리 동기들은 서울 법대 들어오면 입학식 한 다음 날에 벌써 보따리 싸가지고 절간으로 공부하러 들어갔어요. 학교에 나오는 학생이 없었어요. 나는 학교에 항상 꼬박꼬박 나가고, 강의 다 듣고, 만날 사람 다 만나고, 선생님 다 찾아뵙고 그랬지요. 사실 국가고시에 관심이 없었지요. 그랬는데 왜 이게 이렇게 됐느냐.
내가 대학교 1학년 때는, 고3 때까지 공부하느라고 고생했으니까 놀아야지요. 대학교 1학년 땐 놀고, 2학년 때부터 공부를 할 생각이었는데, 2학년 딱 되니까 4·19 혁명이 났어요. 나도 데모를 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거의 1년 내내 학교 강의가 없었어요. 3학년이 되니까 5·16 군사혁명이 나가지고, 계엄령 때문에 학교 다 폐쇄하고 문 닫아버리니까, 학교에 가본들 들어가지도 못하게 경찰이 막고 있지. 들어가도 할 일이 없어요.
그래서 고민을 했지요. 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서울 법대에 들어와서, 나 나름대로 필요한 공부를 스스로 열심히 하고, 얼렁뚱땅 놀면서 대학생활을 지내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그런데 막상 내가 졸업하면, “그놈들 4·19 나고 5·16 나서 학교는 문 닫아, 공부도 안하고 맨날 놀다가 졸업한 애들인데 머리가 비었겠지, 실력은 있겠어?” 이런 식으로 말을 들을까봐 걱정됐어요. 스스로 많이 생각해서 공부를 했다고 그걸 입으로 떠들고 다닐 수도 없고. 그게 어디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스스로 실력이 있다는 징표를 남한테 보여주기 위한 게 뭐가 있겠나 생각했더니, 그러면 국가고시밖에 없는 거야. 내가 그걸 합격하면, 관으로 진출하지 않더라도, “그놈이 엉터리는 아니고 공부도 좀 하고 실력도 어느 정도 있었구만!” 하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국가시험이라도 봐두자, 그렇게 시작됐죠. 남들보다는 좀 늦게.
두 시험 모두 한 번 붙기도 어려운 시험이었을 텐데요.
선배님께 특별한 공부 팁이 있는 게 아닌가 궁금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방법, 시험을 잘 치르는 법 등 어떤 이야기라도 좋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웃음) 지름길이나 왕도라는 건 없지. 그냥 평범한 얘기에요. 첫 번째로 중요한 건 목표 설정이 분명해야 한다는 거고, 두 번째로 중요한 건 고도의 집중이지요.
머리 좋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성이 뭐냐 하면, 머리가 좋으니까 관심 있는 주제나 대상이 너무 많아요. 이것도 호기심 있고, 저것도 해보고 싶고, 이것도 하면 내가 똑똑하니까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요동쳐요. 그 사람이 능력이 있고 우수한 사람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그 우수하다는 것이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안돼요. 결국 제대로 집중하는 사람이 이겨요.
그래서 나는 고시 준비 같은 거 그렇게 오래하지도 않았어요. 나는 3학년 올라가서 ‘해볼까?’ 생각해 가지고 그냥 집중해서 한 사람이야.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고도로 집중한다는 것이 특별한 비장의 무기는 아니지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건데, 실제로 그렇게 실천을 잘 안 하더라고.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 석사를 마치시고 나서 해외에서 박사 과정을 이어가셨습니다.
석사 후 판사나 검사를 하실 법도 한데, 박사를 이어가신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요.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다 합격자가 아주 적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었던, 옛날부터 쭉 내려왔던 인식이, 하여간 사법시험 합격해서 판검사가 되었다든지 행정고시를 합격해서 무슨 높은 자리에 나아간 것을 조선시대 과거 시험 합격한 것과 비견해서 생각하고 그랬어요. 우리 아들이 무슨 과거에 급제를 했다는 둥 등용문에 올라갔다는 둥 이런 식으로, 조선시대의 관념이 그대로 살아 있었지요.
그러니까 이게 엄청나게 어려운 시험인데, 그걸 합격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사람들이 모두 찬사를 하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했거든요. 세태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당시에는 그냥 누가 하나 합격하면 도지사가 상금을 주고 군에서는 잔치를 하고 난리를 치고 그랬어요. 돈 있는 부자들은 중매쟁이들 쫙 풀어가지고, 사법대학원생 하나하나의 백그라운드를 이 잡듯이 파악을 했어요. 실제로 돈 많은 부잣집 딸하고 결혼한 사람도 많았고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자기가 제일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인격이나 인품이 미성숙하고 사회적인 기본 수칙 이런 걸 잘 몰랐던 거지. 판사나 검사, 또 행정고시 해서 무슨 군수나 경찰서장 하는 사람들, 나이가 아직 20대 초반인데, 그 사람들은 무슨 판사님 검사님 그렇게 안 불렸어요. ‘영감님’ 그랬어요. 왜냐하면, 조선시대 때 벼슬로 당상관 몇 급에서 몇 급까지는 영감이고, 몇 급 이상이면 대감이고, 그런 게 있었거든요. 조선시대의 관등이 그대로 적용된 거야. 그래서 20대 초반에 다 영감님이야. 자기들끼리 부를 때도 김 영감, 이 영감, 이렇게 부르고요. 이 사람들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목표를 다 달성한 거야. 그러니까 너무나 좋고, 다른 사람들이 다 대접해주고 모시고, 자기도 자기 잘난 맛에 살고 그랬지요. 그것도 하나의 인간세상이긴 해. 그렇게 뽑힌 사람들에게는 그게 당시 평균적인 이야기였거든요.
믿기지 않네요.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잘 믿지 않지만, 우리 학생 때 이야기에요. 이 사람들은 우수하긴 우수해요. 우리나라 탑 클래스의 인재인 것만은 틀림없었지요. 그런데 나는 처음에 고등고시에 관심이 없었고, 그걸 합격해도 판검사나 군수나 서장이나 이런 데에 나갈 생각은 없었어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으냐. 내가 대학교 들어가서부터 하고 싶었던 게 영어였는데 또 기회가 닿아서 영어 공부를 했고, 그 결과 남보다 좀 잘했었어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눈을 밖으로 돌리게 됐고. 그래서 서양 선진국에 가서 공부를 해오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외국 갈 방법을 물색했어요. 법과대학 선생님들한테 여쭤봤더니, 외국 갔다 온 분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분이, “야, 너 저기 풀브라이트 재단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서 학생들 장학금을 준다고 하거든. 너 영어 잘하니까 한 번 지원해봐.” 그런 식으로 귀띔을 해주셨어요. 내가 풀브라이트 재단에 갔더니, 그 해에 토플시험이 한국에 처음 들어왔는데, 그걸 보라고 그래요. 전례가 없는 걸 하니까 두려웠지. 시험을 봤는데 600점을 맞았어요. 그게 당시 그 시험 최고 점수야. 그래서 재단에서 전액장학금을 줬어요.
그걸 가지고 미국을 갈 생각을 해봤어요. 그런데 하도 한국이 외국과의 연관이 없고, 외국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 내가 외국을 가야 하겠는데, 미국의 어디 대학을 가야 좋은지, 그걸 나한테 조언해줄 사람이 없는 거야.
지금은 한국 사람들이 모두 잘 알지만, 조금 희화적으로 표현하자면, 한국 사람들한테는 미국 대학이 둘 밖에 없어요. 뭔지 알아요?
어... 하버드?
이거 봐요. 입에서 하버드 바로 나오잖아. 한국 사람은 알든 모르든 교육을 받았든 시골에 살든 전혀 교육을 안 받은 할머니 할아버지든, 미국의 대학 그러면 하버드! 나머지 하나는 뭐겠어요?
다른 하나는 말이야. ‘그 나머지 잡것들’이지요. 하버드가 아니면 눈에 안 차서 학교도 아니야. 그런데 하버드가 자기 학교야? (웃음) 미국이 내 나라도 아니고, 미국에 있는 대학이 내 나라의 내 대학도 아닌데 미국 대학 그러면 입에 달린 소리로 의례 하버드라고 하는 이유는 뭐야? 나는 그건 잘못된, 왜곡된 사대주의의 무의식적 발로라고 생각해요. 내가 서울대학교 안 나오고 다른 대학을 나왔어도 내가 나온 모교가 중요하지요.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했냐 하면, 장학금 받았으니 미국에 대학을 가야 하는데, 대학 이름을 하나도 몰라요. 주위에 물어봐도 대답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풀브라이트 재단에 진학 상담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도 몰라요. 그 사람은 자기가 미국에서 다닌 인문사회 대학은 이야기해줄 수 있는데, 법과대학은 모르는 거야. 그래서 나는 하버드란 이름을 그때 당시에 들어본 일이 없어요. 캔 유 빌리브 댓?
예스……!
그래서 할아버지의 아는 분이라고 할까, 그런 분들한테 여쭤봤지. 조병옥 박사나 김도연 박사 같은 분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를 하셨거든요. 컬럼비아 대학이 미국에서 최고라는 거야. 또 최규남 선생은 미시건 대학에서 수학으로 박사 하신 분이에요. 그러니까 미시건 대학이 1등이라는 거야. 윤치영 선생은 유니버시티 오브 서든 캘리포니아(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공부하셨기 때문에 거기가 최고라는 거야.
나는 그렇게 미국 대학 이름을 세 개 밖에 들은 기억이 없었어요. 그런 상태에서 학교를 선택하여 미국을 가야 했어요. 얼마나 우스웠겠어. 근데 내가 특별히 원한 게 하나 있었는데, 한국 법학이 대륙법에서 들어왔거든? 우리가 독일법을 받았지만, 프랑스 나폴레옹 법이 독일법에도 영향을 많이 줬어요. 그래서 한번은, 미국에서 원전이 되는 프랑스법을 공부하면서 불어도 좀 배울 수 있는, 그런 대학이 없냐고 물어봤었지요. 그랬더니 나더러 남쪽 뉴올리언스에 있는 툴레인 대학(Tulane University)을 가래요. 거기에선 프랑스법을 가르칠 테니까 거길 가라는 거야. 나는 또 물어봤지, 뉴올리언스라는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불어를 씁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그래요. 사실 모르고 대답한 거야. 나는, 그럼 거기 가겠습니다, 하고 갔어요.
그러면, 뉴올리언스에서는 불어를 쓰지 않았던 건가요?
쓰기는 무슨 불어를 써. 순전히 허위사실이야. 근데 어떻게 해, 그냥 다녔지요. 그렇게 해서 한국 사람이 잘 모르는 툴레인 대학에 가서 석사를 했어요. 그런데 직접 미국에 가보니까, 미국의 모든 게 다 서유럽 선진국에서 계수(繼受)한 거란 말이야. 미국에서 1년을 공부했는데, 결국은 본고장을 가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파리로 갔지요. 소르본으로.
그런데, 와... 과장하자면 학교 강의실이 난민 수용소보다도 못해요. 프랑스가 세계에서 1위 선진국인데, 또 소르본이 대학 중에 대학 아닌가. 강의실 들어가니까 교실이 학생으로 꽉 차가지고, 선생님 발밑에도 앉고, 창틀에 걸터앉고, 복도에 서서도 듣고, 학생들이 포개져서 필기한다는 건 상상도 못했지요. 그냥 콩나물시루같이 꽉 껴가지고, 통풍도 안 돼서 후덥지근하지, 이런 데가 있나 싶었지요.
학교 시설이 왜 그랬던 건지 의아하네요.
무리한 복지정책 때문에 이렇게 된 거에요. 사회당이 쭉 집권해가지고 계속 돈을 퍼주는 거야. 거의 모든 게 학생에게 무료지요. 대학도 다 국고보조금으로 운영하고요. 철도나 비행기는 80% 할인. 학생 식당에 밥 먹는 건 거의 다 공짜. 막 복지급여를 퍼주니까 결국은 교육 시설 투자를 못한 거야. 학생들한테 막 퍼주니까 그쪽으로 돈이 다 나가서 나라 재정은 재정대로 엄청난 적자고. 교육개선은 되는 게 없고.
결국은 68년에 프랑스 5월 혁명이 일어났지요. 학생들이 전부 강의를 거부하고 길거리로 뛰쳐나갔어요. 길바닥에 포장된 조약돌을 다 뽑아가지고 그걸 경찰한테 던졌지요. 경찰들은 최루탄 쏘고. 하숙집으로 최루탄이 들어와서는 방에서 터지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노동자들이 제너럴 스트라이크를 했어요. 이게 총파업으로밖에 번역이 안 되는데, 그냥 죽는 거나 마찬가지야. 왜냐, 모든 게 다 스톱이야. 편지 배달, 우유 배달, 신문 배달, 이런 거 다 스톱. 전화, 전보, 전신 다 불통. 식료품 공급이고 뭐 빵 공급 일체 없고, 시내 다녔던 지상교통, 버스나 지하철 이런 게 다 중단돼요. 전기도 나갔다 들어왔다 자기 맘대로지요, 주유소도 파업해서 차도 못 다니지요. 모든 생활이 철저히 올 스톱이야. 그런 상황에 우리 같은 외국인들은 어디 기댈 데도 없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도 없는 한계상황 속의 인간이 되지요.
근데 그 제너럴 스트라이크가 파리에만 일어난 거거든요. 내가 걷고, 걸어서 파리를 벗어났더니, 거기서부터는 채소며 빵이며 고기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고, 총파업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거야. 아무튼 제너럴 스트라이크 때문에 파리에서는 공부가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갔지요.
영국 학교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나요?
툴레인 대학 다닐 때 케임브리지 교수가 거기 와서 강의를 했었는데, 그 사람이 나랑 친해져서 자꾸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너희 나라에서는 한미 간의 특수 관계가 있으니까, 외국의 일반적인 의미가 미국이고, 서양 것을 배운다 그러면 다 미국 것을 배우고, 다 미국이 표준이고 그러는데 말이야. 그건 좋지만, 그래도 미국 것이 다 서유럽에서 온 거 아니겠니. 그러면 본고장에 가서 제대로 된 걸 배우는 게 필요해.” 그래서 내가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본인이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니까, 내가 다리를 놔줄테니 신청을 해서 승인이 나오나 보라고 했어요. 근데 입학지원했더니 입학허가서가 나오더라고.
그래서 하나 받아놨지요.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대비해야 하니까요. (웃음) 그렇게 케임브리지를 가서 공부를 했으니 유럽의 대표적인 문명들을 배웠지요. 그때 그 케임브리지 교수가 이렇게 말해줬지요. “유럽의 문명이 서로 다르다. 그것들을 네가 비판적인 안목으로 수용하고, 미국 것과 유럽 것을 합쳐서 서양 문명에 대한 균형 감각을 가져라. 그러면 네가 지도자로서 굉장히 큰 도움을 받을 거다.” 지금 생각해도 그 말씀이 맞아요.
그렇게 영국에서 공부하고선 박사를 하려고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간 배운 걸 정리해서 여러 대학에 내 연구 계획서를 제출했어요. 그런데 대부분의 대학이 박사과정에는 직접 못 받아준다, 일단은 석사과정으로 들어오라고 그래요. 그런데 나는 돈이 없었어요. 석사를 또다시 1년 하는 동안 장학금도 안 줄 텐데, 집에다가 돈 달라고 손 내미는 건 말도 안 되고. 그때 코넬 대학이 내 계획을 보더니, 내가 참 특이한 놈이라고 생각한 거야. 우리 학교로 오면 박사 과정에 그냥 넣어주겠다고 해서 거기로 갔어요. 나는 미국에서, 프랑스에서, 영국에서 공부한 걸 다 종합해가지고 박사논문을 냈지요. 보통 한국 사람이었으면 손해를 보고도 하버드 갔을 거야. 그런데 나는 그렇게 선택을 안 했지요. 하지만 내가 나중에 하버드 법대에서 강의를 3년에 한 학기씩 20여년 했잖아요. 나는 하버드 다녀보지도 않은 사람인데...(웃음)
그렇게 수학을 마치시고 나서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셨습니다.
선배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법학자로서의 목표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처음부터 목표가 아주 명확했어요. 일본의 식민 법학을 극복하는 것.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우리나라가 후진국이니까, 조선시대가 물러나고 구한말부터 서양의 제도 문물이 들어오는데, 그 모든 것들이 사실상 우리를 지배하던 일본 사람들을 통해서 들어온 거죠. 법의 경우에는 독일법학이 일본으로 계수돼서, 일본 사람들이 자기네 법학 체계를 만든 다음 그걸 다시 우리한테 덮어씌운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간접적으로 독일 법학을 받은 거란 말이죠. 계통을 따지자면 그렇게 되어 있지요.
나를 가르친 은사 선생님들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 교수들한테 독일에서 계수한 일본 법학을 배운 거지요. 그러고 나서 해방이 되니 일본인들이 다 물러가고, 대학들이 공백이 생기니까 이분들이 다 교수가 됐어요. 당시엔 나라가 너무 가난하고 그랬으니까, 학문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은사님들께서는, 그런 어려운 시절에 교수가 되셔서 흔들리지 않고 학교의 중심 틀을 잡아주셨지요. 그래서 다 존경할 만한 분들이야.
그분들한테 우리가 배운 것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엔 교과서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이 양반들이 일본 책을 그냥 가져와가지고 강의 시간에 한국말로 번역하면서 읽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그게 일본 것이지만 그냥 받아쓰고, 그게 최고인줄 알고 그랬어요. 그러다 보면 일본인 누구 원저, 한국 교수님 아무개 번역, 이런 식으로 책이 나와요. 그게 몇 년 지나가면 아무개 번역이 아무개 편역(編譯)이 되고, 편역이 몇 년 가면 아무개 편(編), 그게 몇 년 가면 아무개 저(著)가 돼요. 교과서가 이런 진화 과정을 거친 거예요.
진화라는 말이 참 적절하네요.
옛날엔 우선 어학이 안 됐어요. 영어에서부터 아무 어학도 안 되니까 외국 법률문헌을 볼 줄도 몰랐지요. 아는 게 일본어밖에 없으니, 하는 수 없이 일본 사람들이 해놓은 걸 학생들한테 가르치는 재료로 썼는데, 일본도 자기네들이 원천적인 게 있나, 다 독일이고 프랑스고 영국에 가서 수입해서 가져온 걸 일본 환경에 맞게 번안해놓은 거에 불과한데 이것을 우리가 그대로 가져다가 교재로 사용했지요. 나는 어떻게 생각했냐면, 우리 세대는 외국 유학을 했지요. 내가 미국 유학생이었고, 또 외국 유학하신 선생님들이 계셨어요. 우리는 서양 유학생이라서 영어도 하고 불어도 하고 독일어도 다 할 수 있어요. 학문할 어학능력이 있으니 일본학자들이 일본에 맞게 연구한 것을 우리가 베껴서 수입 해다가 한국 것으로 쓰지 말고, 일본 의존도를 줄이자는 거야, 우리가 어학이 되니까, 직접 독일로 프랑스로 영국으로 가자. 일본인 교수와 나란히 같이 연구하고 경쟁하고, 토론도 하고, 배워올 거 있으면 한국적인 환경에 맞게 응용하고 말야. 우리가 직접 그렇게 하자. 그렇게 식민 법학의 예속에서 벗어나서 우리 한국의 고유한 법체계, 법학 연구 방법론 같은 것들을 모색하자. 그게 내가 학생 때부터 아주 강력하게 주장한 지론이에요.
지금 보면, 일부만 성공했고. 내가 보면 성공을 못 했지요. 우리나라 학문 풍토가 그렇게 학문 친화적이지 못해서 그런 것도 있고. 하여간 나는 누가 뭐래도, 일본 식민 법학에 대한 의존을 끊고, 우리 한국의 고유한 법학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목표였어요.
오랜 시간 서울대학교 법학대학 교수로 재직하셨는데요. 선배님께서는 교육자로서도 큰 존경을 받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선배님의 교육관, 교육철학이 궁금합니다.
내가 3학년 때 5·16 쿠데타가 났거든요. 당시 상황이 어땠냐 하면, 국회를 없애버렸어요. 그땐 국회가 비능률적이고, 정치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고,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그런 국회였지요. 군사혁명 세력은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잘 이용해서 국회를 해산시켰고, 정치인들이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게 법으로 묶어버렸어요. 그렇게 하고는 국가재건최고회의라고 하는, 국회를 대체하는 의결 기관을 만들었어요.
그때가 61년인데 그전까지 우리가 기본적인 법률, 예를 들면 헌법이나 형법 등 이런 것들은 급한 대로 다 만들었는데, 사실 기본 육법 중에서 제대로 안 된 법이 대부분이었어요. 민상법은 물론 중요한 노동법이라든지 환경법 같은 건 손 댈 생각도 못하고. 일제 강점기에 만든 법률이 그대로 쌓여 있었던 건데, 마치 우리가 제정한 법인 것처럼 우리한테 의용(依用)이 됐었어요.
그런데 혁명 주체들도 그게 못마땅한 거야. 국회에서 법안 심의를 빨리 해가지고 통과시켰으면 기본법 다 만들었을 텐데, 뭘 하고 있다가 이 정도만 겨우 만들어놨냐는 거야. 그래서 이 사람들이 법을 막 만드는 거야. 중요한 법을 통과시키는 데에 30초. 땅땅 치면 하나 통과하고, 땅땅 치면 하나 통과하고. 하루에 100건, 200건씩 막 통과시키는 거야.
그런 일은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데요.
내가 법과대학 학생이었는데. 이런 입법과정을 보면서 뭘 느꼈냐. 정의는 실체적 정의가 있고 절차적 정의가 있어요. 지금 이 군인들이 하는 일은, 법안내용이 잘 만들어졌는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절차적 정의는 틀림없이 위반하는 게 아닌가. 말이 안 되잖아요. 일반 국민의 생활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중요한 법을 말이야, 아무리 그전의 정치인들이 싸우느라고 시간을 잡아먹었다고 하더라도, 법안 하나를 30초 만에 통과시킴으로써 절차적 정의가 백 프로 훼손되고 있구나 생각했어요.
당시 군인들은 목표가 정당하면 과정이나 절차는 좀 흠결이 있어도 괜찮다는 식으로 생각을 했어요. 나는, 그게 아니다, 목표도 정의로워야 하고 절차도 정의로워야지, 무언가가 희생된다든지 흠결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면서 절차적 정의가 무시되는 모습은 장래법률가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봤고, 그래서 절차적 정의를 교수가 된 다음에도 자꾸 이야기를 했죠.
또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지요. 벼슬이 높은 고관의 자녀들도 강의실에 많이 앉아 있었겠지만, 그러한 너희 아버지 술 사주고 용돈 주고 골프 치게 해주라고 기업이 열심히 활동해서 돈 버는 거 아니라고 유착관계를 질타했지요. 자네들이 조금 있으면 그런 높은, 책임 있는 자리에 갈 사람들인데,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자기 것만 가지고 살아라. 남한테 그런 거 얻어먹지 마라. 퍽 강조했어요.
사실 강의 내용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지만, 윤리도덕적인 문제, 사회규범적인 문제, 그리고 정의와 공정의 문제에 대해 나로서는 그런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걸 학생들에게 자꾸 얘기했어요.
선배님께서는 2003년부터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2009년부터 2015년까지는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으로도 지내셨는데요. 처음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1945년에 유엔이 설립돼서 지금 75년이 됐어요. 유엔의 설립 목표가 뭔지 아세요? 세 가지에요. 하나는 평화와 안전. 또 하나는 인권. 마지막은 발전(development)이에요. 이 중에서 발전은 2015년에 지속가능한 발전목표(SDG,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열일곱 개로 구체화되어서 2030년까지 목표 달성을 하자고 합의되었고요. 인권은 보편적 개념이기 때문에, 어느 경우에도 적용되는 출발점인 동시에 종착점이에요. 그리고 전쟁 나면 다 죽고 파괴되는데, 평화와 안전은 더 이야기할 게 어디 있어요, 전쟁이 안 나야지요. 이렇게 세 가지 임무가 부여되면서 유엔이 창설됐어요. 그렇다면 유엔은 어떤 수단으로 이 세 가지 목표를 달성했는가,
하나는 국제사법재판소(ICJ,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라는 걸 만들었어요. 국가끼리 국경 분쟁이 있다든가 해안선 분쟁이 있을 때, 총 들고 쏘지 말고,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지고 오면 우리가 법적으로 재판해서 옳고 그름을 가르쳐 줄 테니 재판으로 해결하자. 유엔이 가진 평화유지수단의 넘버원이 그거야.
또 하나는 유엔안보리(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집단제재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나라가 남의 나라를 침범한다든지, 전략적 무기를 만든다든지 하면서 국제평화를 교란하고 있다면, 유엔안보리에서 결의해가지고 어떤 강대국이 군대를 파견해서 그 나라를 무력화시키거나, 아니면 유엔이 집단제재를 해가지고 봉쇄해버리지요. 결론적으로 유엔은 앞서 말한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와 유엔안보리, 두 가지 수단을 가지고 불충분하게나마 세계 평화를 유지해왔어요.
유엔이 그 둘만 가지고 세계평화를 유지하면 되고 유엔이 잘 해왔는데, 왜 2002년에 국제형사재판소가 생겼냐 하면 뭔가 부족한 게 한 가지 있는 것 같았어요. 그게 뭔지 생각해보니까, 전쟁을 일으킨 수괴를 잡아다가 죄를 추궁하는, 그런 메커니즘이 없는 거예요. 유엔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하고 안보리에서 집단제재를 해도, 그 전쟁을 일으킨 독재자는 도둑질한 재산을 가지고 좋은 데 가서 여생을 아주 잘 보내는 거야. 그래서 50년 동안 논의의 논의를 거듭하다가, 응보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국제형사재판소가 생겨난 것이지요.
물론 ICC(국제형사재판소)는 유엔하고 전혀 별개이고 달라요. ICC는 ICC고 유엔은 유엔이야. 한국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ICC를 유엔 산하의 기구 중 하나로 생각한다는 거야. 전혀 다른 두 독립 기관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선배님께서는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법원이 새로 생기면 거기에 첫 사건이 들어오기까지는 한 3년 걸려요. 새로 생긴 법원은 사건이 들어왔을 때 그걸 재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내부적인 규정을 만들지요. 내가 한 일 중에는 전자법정을 만드는 것도 있었어요. 전자법정 만드는 책임을 전부 나한테 맡기더라고. 왜 그랬냐 하면, 재판관 18명 중에 어디 대법원장하던 동료가 이렇게 말했어요.
“헤이 송! 유 아 프럼 삼성 컨튜리. 유 슈드 비 리스폰시블 포 이 코트 메이킹.”
(“Hey Song! You are from Samsumg country. You should be responsible for E-court making.”)
그래서 졸지에 바가지를 썼어요. 내가 했는데, 지금도 잘 굴러가요. 어쨌건 그때는 법원이 내부적으로 준비를 해야 했지요. 시설을 갖추고 기초를 닦는 일, 그런 것들이 중심이었어요. 내가 2003년에 시작했는데 2006년에 첫 사건이 있었으니까요.
그 다음은 어땠나요?
중요한 이야기를 하자면, 국제형사재판소는 말 그대로 형사재판소에요. 죄 지은 혐의자를 잡아다가 재판해서 죄가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고, 죄가 없다면 무죄로 내보내고. 그렇게 하고 손을 딱 씻어버리면 그게 형사재판소의 임무로서는 끝이지요. 그렇게 ICC를 만들었다고 하면, 그건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는 형사법원하고 다를 바가 없어요.
ICC는 형사재판이 끝났다고 해서 손을 털고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ICC는 네 가지 범죄만 관할하게 되어 있어요. 전쟁범죄, 침략범죄, 집단학살, 그리고 반인도적 범죄. 그런데 범죄자를 처벌해도 그 범죄로 말미암아 무고하게 학살당하고 피해를 입은 양민들, 그 나라 국민들의 피해는 회복이 안 된다고요. 범인 잡아서 20년, 30년 감옥에 넣는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입은 피해가 복구가 안 되지요.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거에 착안해가지고, ICC는 기본적으로 형사재판소지만, 유무죄를 가려주면서도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죄 없는 피해자들에게 피해를 보상해주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해서 먹고 살 길을 찾아가게 도와주는 역할도 하고 있어요. 범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한두 사람도 아니고 수백만인데, 그걸 다 보듬어 안으면서 어떻게든 그 사람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있지요.
그런 형사재판소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봤어요? 못 들어봤지. 인류 역사상 이게 처음이에요. 아주 중대한 실험을 하는 거에요. 성폭행 당한 사람이 트라우마를 극복할 때까지 심리상담을 해주고, 집이며 가축이며 다 잃어버린 사람한테 돈을 대여해서 길거리에 좌판이라도 하나 마련해서 생활 수단을 마련해주는 등 여러 가지 대책이 있는데, 그걸 우리 재판소가 다 프로그램 하거든요.
죄 있는 사람 잡아서 응분의 처벌을 하는 정의는 형사적 정의, 응보적 정의라고 해요. 그런데 이 피해자를 다시 재활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는 정의는 회복적 정의, 치유적 정의야.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정의는 인과응보의 논리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거기서 끝이지요. 그런데 21세기가 됐으니까,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거야. 치유적 정의, 회복적 정의까지 국제형사재판소가 아울러서 실현한다는 것이, 그게 ICC의 설립 목표에요. 형사법원이 그런 일을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을 거야. 이건 인류 최초의 실험이거든. 이게 잘못 되면요, 인류의 희망이 없어져요. 이건 꼭 성공을 해야만 해요. 내가 ICC 소장 하는 동안에 이 프로그램을 제대로 가동시키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어요. 지금 그런 대로 잘 돌아가요. 우리나라에서는 잘 모르지만, 그게 전 세계적으로 큰 임팩트를 주고 있어요.
2012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을 지내고 계십니다.
유니세프와의 인연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세계에 200개국 정도가 있다고 치면, 그중에 한 나라도 빠짐없이 유니세프 본부에서 컨트리 오피스라는 지점 비슷한 걸 내요. 그게 옛날에 우리나라에도 있어가지고, 본부에서 직원들이 와서 우리들을 도와주고 그랬어요. 내가 부산 피난 가서 굶주리고 학교도 못 다닐 때, 어느 날 갑자기 우유가 오고 학용품이 좋은 게 오고 그래요. 이거 어디서 왔냐 물어보니까 ‘유니세프’에서 왔대요. 그렇게 열 살 때 유니세프 이름을 처음 들었지요. 내가 그 혜택을 직접 입은 사람이야.
유니세프한국위원회에 대해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전 세계에 컨트리 오피스가 있었는데, 한국이 발전하고 경제수준이 높아지니까 유니세프에서 여기 설치했던 컨트리 오피스를 철수했어요. 그 대신 94년 1월 1일부터는 유니세프한국위원회라는 독자적인 우리 국가위원회를 만들고 알아서 경영하도록 했어요. 사실 아무 나라나 국가위원회를 조직해서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한국을 포함해서 33개의 소위 선진국만 국가위원회를 만들어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선진국의 기준은, 하나는 경제발전의 수준,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 성취도. 이 두 가지 기준을 놓고 선진국 여부를 결정하니까 아시아 54개국 중에서 해당하는 나라는 일본하고 한국밖에 없어요.
그 33개의 국가위원회 중에서 유니세프한국위원회는 세계 1등입니다. 가장 크고 가장 모범적이고 가장 잘 돌아가는, 누구든지 배우고 싶어하는 그런 유니세프국가위원회입니다. 통계 숫자를 이야기하자면, 후원자들한테서 받은 1년간의 총 기부금 액수가 나오는데, 그 액수를 평면적으로만 보면 미국이 1등이고, 일본이 2등, 한국이 3등입니다.
그런데 나는 항상 항의하죠. 3억 5천만이 걷은 돈하고, 5천만이 걷은 돈을 똑같이 놓고 이게 1등이고 이게 3등이라고 하면 말이 되냐고. 일본만 해도 우리나라보다 인구가 3배나 많은데, 일본이 걷은 돈을 우리가 걷은 돈이랑 같이 두고 이게 2등이고 이게 3등이라고? 나는 이거 인정 못해요!
작지만 강한 민족이군요.
다른 기준에서도 우리가 1등이에요. 기부금을 모금하려면, 비용이 발생해요. 모금 활동을 하는 사람이 우리 직원이면 월급도 줘야 하고. 비용이 여러 가지로 발생하는데, 모금 총액 대비 발생 비용이 이게 국제적으로 30%까지는 허용이 돼요. 그러니까 1000원 걷으면 300원은 비용으로 써도 된다는 건데. 영국이 지금 26%쯤 가니까 벌써 지금 워닝 사인(Warning Sign)이 들어가면서 전 세계적으로 야단이지요.
한국은 7%야. 1000원 걷으면 70원 밖에 안 써요. 지금 우리 시설을 보수하고 있기 때문에 그게 조금 올라가서 9%가 넘어요. 그건 일시적인 거고. 나중엔 도로 내려가죠. 이건 기네스북에 올라갈 정도의 통계수치에요.
또, 한국에서 1년을 모금하면 본부에 송금을 해요. 유니세프 본부는 국가위원회한테서 돈을 받으면 그걸 다 모아서 전 세계 우선순위를 정하여 급한 곳에 돈을 배분하는데, 송금하는 액수가 우리가 1등이에요.
긴 세월 동안 나눔을 실천해 오시면서 힘든 점은 없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해온지 47년 정도 됩니다. 남을 돕는 데에 대한 경험이 여러 가지 있는데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키가 크든 얼굴이 못났든 상관없이 부모한테서 생을 받았으면, 자기 나름대로 한 세상을 그런대로 살아야 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아무 노력도 안 했는데 잘 살고, 어떤 사람은 잘 못 살고 그러냐. 암만 못난 사람이라도 부모에게 생을 받았으면 그 자도 나름대로 자기의 삶이 있고, 일생을 어떻게 좀 살고 가야지. 요새 표현으로 말하면 금수저, 은수저 정도 되는 사람들이 남을 돕는 일을 정부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마인드가 있어야 해요. 옛날 말에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들도 형편이 되면 더욱 좋고,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좀 나누면 어떠냐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에요.
전에 내가 교수 되고 나서 제일 먼저 생각한 게 뭐였냐면, 그 당시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세 그룹밖에 없었어요. 하나는 노인, 하나는 어린이, 하나는 장애인. 그래서 내가 누굴 도울까 생각하다가 노인을 돕기로 결심했어요. 노인을 도우면 한국의 효사상하고도 맞아요. 그러니까 마음속으로 생각해도 편안해요. 학생들은 물론이고 우리 동료 교수들, 직원들이 내가 그런 일 하는 걸 알게 됐는데 반응이 싸늘했어요. 그때 나보고 누가 살짝 그래요.
“너, 국회의원 나가려고 그러지?”
그러니까 내가, 고시 양과 해서 원하면 판사나 검사가 될 수 있었고, 군수가 되거나 경찰서의 서장이 금방 될 수 있었지만 그거 다 버리고 내가 젊은 학생들하고 노는 게 좋아서 학교로 왔는데, 노인을 도왔던 걸 국회의원 나가려고 그러는 걸로 본 거야.
상심이 크셨겠습니다.
아, 세상이 간단하지 않구나. 그래서 그날로 내가 생각을 바꾸었지요. 그리고 어린이를 돕기 시작했어요. 어린이는 유권자가 아니거든. 선거 나간다는 오해는 안 받았죠. 그랬더니 형식적으로만 말하면 우리나라 법에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는 두 가지 타입밖에 없대요. 뭔지 알아요? 하나는 아픈 어린이. 다른 하나는 굶는 어린이. 그 외에 다른 아이는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의 카테고리에 법적으로도 안 들어가고, 도와줘도 도와준 게 아니래요.
아픈 어린이도 두 종류밖에 없어요. 다른 걸로 아프면 도움이 필요한 아픈 어린이가 아니야. 하나는 심장병 어린이, 다른 하나는 암 걸린 어린이. 딱 두 가지밖에 없어요.
그중에서 심장병 어린이는 대통령 영부인이 직접 취급해서 도왔어요. 박정희 대통령 때 ‘양지회’라고 계속 이어져오다가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까지 갔어요. 그래서 내가 백혈병 어린이 재단을 법인화한 거예요. 혈액암이 다양한데, 그중에서 백혈병이 제일 자주 걸리는 병이다 보니 혈액암의 대표명사지요.
결식 어린이는 간단해요. 정부의 통계가 있어서, 몇 명이 밥을 굶고 하루 세 끼를 못 먹는지 다 나와요. 우리나라 통계가 꽤 정확해서, 틀림없어요. 조금만 계산하면 예산 얼마 딱 나오잖아. 산술적으로 간단한데 당시 거기에 부정이 많아서, 나도 같이 쓸려 들어가겠다 싶어서 빠졌어요.
지금은 내가 유니세프만 하죠. 나머지는 안 해요.
충격적이네요. 확실히 나눔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기부하는 사람의 심리를 보면 말이야, 내가 기관에다 돈을 줘도 믿을 수가 있나, 내가 낸 돈이 과연 거기 전달되어서 제대로 효과가 나겠나, 그런 관심이 있거든요. 적어도 유니세프는 회계 상태를 공개할 수가 있어요. 홈페이지 들어가서 보시면, 우리의 수입지출, 그게 늘 있습니다. 예전에도 내가 TV 출연하면서, 앵커가 자기도 유니세프 몇 년 동안 기부한 사람인데 자기 돈이 어떻게 얼마나 쓰여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는 거야. 그래서 유니세프 직원이 인터넷에 검색해서 지출내역을 쫙 인쇄해서 갖다 드리니까 그 이상 말을 못하시더라고요.
한편으로 유니세프의 통계를 보면, 한국만큼이나 나눔 문화가 잘 정착된 곳이 없는 듯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한국이 세계 모금 시장의 봉이야. 그래서 한국과 관련도 없는 외국의 이름 없는 단체가 들어와가지고, 무슨 사무실 하나 잡은 다음에 광고 또는 모금활동 등을 바깥에 외주를 줘요. 그렇게 해서 모금한 그 돈이 나중에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한국 들어와가지고 모금활동을 하는 단체들이 굉장히 많아요. 어디 빌딩에 방 하나 비집고 들어가면, 지역 사회에서는 그걸 국제기관 하나를 유치한 업적으로 삼아서 통계 숫자 올리고 앉아 있어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마케팅을 하고 광고를 하면 한국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즉각 반응을 하지요. 그런데 외국 사람들이 이런 걸 잘 이용해요. 유니세프야 75년간 존재하면서 그 국제적 명성과 업적이 그대로 있는 기관이고, 우리 국가위원회도 94년 1월 1일부터 지금까지의 업적을 숫자로 이야기할 수 있고, 하등 숨기는 것도 없이 다 떳떳하게 한다지만, 내가 봐서는 좀 이상한 기관들이 한국에 와서 빅팀 마케팅을 통한 부당한 모금을 하는 경우가 있죠.
선배님께 다음 목표는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목표랄 건 없지요. 그저 나는 나의 다양한 국제경험, 국내경험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에서 나한테 부탁하면, 직책도 필요 없고, 돈도 필요 없고, 우리나라 국익을 위해서 있는 힘 없는 힘 다 바칠 텐데. 우리나라에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아서. (웃음) 금년도에 회고록이나 내놓고 보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요.
법학을 공부하거나, 법조인이 되고픈 학생들에게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기본적으로 법학은 상식이나 논리로서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을 규율하는 규범과학이거든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법과를 다니려고 하는 본인이나, 그 부모나 주위에 있는 어른들, 이런 분들은 아직도 옛날 관념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법이 권력과 돈, 그리고 명예를 거머쥐기 위한 가장 빠른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인식.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요. 이건 그냥 상식과 논리의 학문으로서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을 규율하는 기본적인 학문일 뿐이지, 권력, 돈이나 명예를 거머쥐기 위한 수단이 아니에요. 법을 남이 못 갖는 자신의 새로운 무기나 수단으로 삼아 조금 더 우월적인 지위에서 큰 소리를 쳐보겠다는 생각보다는, 법의 기본인, 정의와 공정 등, 그 기본 가치를 잊지 말고, 일상생활에서 정의와 공정에 맞는 언행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고등학생에게 해주시고픈 말씀이 있으실까요?
고등학생이면 인간 발달 과정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가장 빠르게 발달하고, 인격 형성이라든가 모든 면에서 가장 중요한 기간이잖아요, 원론적으로 말하면 운동을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읽어야 해요.
운동은 가급적이면 혼자 하는 골프나 테니스 같은 거 말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하는 운동을 많이 해야 하는데요, 그 이유가 뭐냐. 협동심, 희생정신, 이런 걸 부지불식간에 길러 주는 가장 좋은 수단이 운동이지요.
내가 우스갯소리를 할게요. 국제형사재판소에서 내 밑에 근무하던 한국 사람이 나한테 인사를 와서, 제 아들이 이번에 영국 이튼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요. 영국의 이튼스쿨(Eton College) 다 알죠. 자기는 너무나 당당하고 자랑스럽고, 또 느긋한 나머지 이야기를 해요. 내가 한껏 축하한 다음 농담으로 말하기를, “아드님은 앞으로 공 차느라고 바쁠 텐데?” 그랬더니 무슨 말인지 전혀 몰라.
그게 아주 상징적인 대답이에요. 사실 이튼 나온 사람이 희생정신, 봉사정신이 투철해서 전쟁 때 자원으로 참전해 돌아가신 분이 제일 많아요. 이튼에 들어갔다고 하면 보통 한국 부모의 기대는, 얘가 좋은 학교를 들어갔으니까 좋은 선생님들이 온갖 학문 분야 과목을 열심히 많이 가르쳐줘서, 얘가 지적으로 굉장히 풍요한 사람이 되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가 되어서 나오겠거니 기대를 하지 않을까요? 좋은 학교에 갔으니까.
그런데 이튼의 전통적 교육방침은, 원칙적으로 학생들이 오전에만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주로 단체운동을 해요. 그건 왜 그러냐. 여러 명이 축구를 하면서, 공격수한테 패스해서 그가 차서 넣게 하고, 협동이 안 되면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지요. 뛰어다니는 동안에 협동심을 기르고, 우애를 기르고, 희생정신, 봉사심을 기르고, 몸도 튼튼해지고, 그러면 정신도 튼튼해지고, 그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오후에는 계속 축구만 시킨다고 상징적으로 말한 거예요. 한국 부모의 기대에 어긋날지도 모르지만, 우리 아들 가서 공부만 잘할 줄 알았더니 가서 운동을 굉장하게 시키니까요.
많이 놀랍네요. 오후 내내 공만 찬다니...
그게 한국하고 영국의 교육방식 차이입니다. 한국에서는 희생, 봉사정신, 협동심, 이런 것들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교복 입은 아이들 교실에 쫙 앉으라고 하고, 선생님이 들어와서 희생이라는 것은 개념이 뭐다, 협동심이라는 건 그 의미가 이렇다, 이런 걸 장황하게 개념적으로 풀어 설명한 다음, 공자님은 이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고,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렇게 이야기했고, 최근에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는 식으로 이념적으로 설명을 해요. 학생들은 또 그걸 들으면 막 외워가지고 시험을 보지요. 이게 한국 교육이야.
영국 교육은 협동심이 뭔지 뜻을 가르치거나 희생, 봉사정신의 개념이 뭔지 설명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공 차라! 한 학기 내내 공을 차다가 보면 협동심이라는 게 뭐고, 어떻게 하는 게 희생이고 봉사인가를, 11명이 한 팀이 돼서 공을 차고 무릎이 깨지고 다치고 발이 부러지는 동안에 배우는 거야. 그 개념을 각자 스스로 터득하는 거지요. 이 사람이 터득한 희생, 봉사, 협동심의 개념이라든가 그 내용이 내가 터득한 것과 다를 순 있어도, 어떤 경우에 우리가 힘을 합쳐서 함께 해야 하는지, 언제 내가 모범을 보이고 희생을 해야 하는지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지요. 그게 영국의 교육 방식이야.
교육이라는 게, 그런 식으로 어떤 인간이 사회생활의 한 주인공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이런 덕목들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해주는 것이니까요. 우리처럼 뭐, 개념설명하고 공자님, 프란시스 베이컨 찾을 게 아니라, 이튼에서는 스스로 직접 실천을 통해서 터득하라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고등학생이 그런 삶이 어디 있어요. 다 대치동으로 가기 바쁘지요. 밤 12시에도 집에 올까말까지.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하면 부모님이, 그 사람은 외국에 몇 년 살고 오더니 한국 실정을 아무것도 모르네, 헛소리만 하고 있네,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지요.
저도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우선 다른 걸 다양하게 못하겠으면 닥치는 대로 책을 많이 읽는 건 꼭 필요해요. 내가 ICC에서 소장이었을 때 처음에는 1년에 한 오천 명 정도 ICC를 방문하더니, 요새는 한 3만 5천, 4만 명이 온다네요. 한국에서도 엄청나게 많이 와요. 사법연수원 학생들도 오고, 대학원생들도 자기들끼리 오고, 학회에서도 오고, 대학생 1학년, 2학년밖에 안 되는 사람도 많이 와요.
내가 학생들이 오면 비슷한 연배끼리 붙여줘요. 모두 ICC에 관심 있어서 온 거니까, 같은 주제를 가지고 토론도 해보고 의견도 교환하고 재밌는 얘기도 해보시라고 기회를 마련해주거든요. 한국 친구들은 어학을 잘하지만, 기본적인 인사말이랑 케이팝 어쩌구, 한 두어 마디 십 분쯤 하다가, 본격적으로 인권의 역사가 어쩌구 나오면 한국 학생들이 입을 딱 닫고 아무것도 얘길 안 해요. 토론의 본질로 들어가면 한 마디도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걸 내가 12년을 보지 않았겠어요? 해가 바뀌어도 그게 안 바뀌더라고요. 우리나라 학생을 수도 없이 많이 봤는데도.
인문사회적인 기초 소양이 부족해서 그래요. 내 나라 내 것도 많이 부족해요. 본인이나 부모님은 그런 걸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줘야 하는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닥치는 대로 책을 많이 읽어야 해요. 그러면 어떤 건 자신의 머리를 딱 쳐가지고, 인상이 깊게 남아 몇 십 년 후에라도 자기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우가 있어요.
인문사회 교양이 결국 다 서양문명인데. 한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문명을 세워서, 한국 중심으로 세계가 이뤄졌다면 한국 것을 다른 사람들이 와서 배워야지. 하지만 지금은 서양 것을 미우나 고우나 배워야 하니까, 책을 많이 읽을 수밖에 없지요. 어떻게 하겠어. 공 차는 거야 내가 현실도 모르고 하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책을 읽는 건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면 가능해요.
독서를 많이 강조하겠어요. 별 이야기가 아니고 다 남들도 하는 이야기지요. 독특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독서를 통한 광범위한 상식의 구비가 너무 절실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