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공, 나의 진로
당신을 적고 듣는 이유
당신의 텍스트는 나의 텍스트
나의 텍스트는 당신의 텍스트
…
당신의 나는, 나의 당신은
聽人, 청인
반평생 읽히고 들어져 왔을 시인이자 음악가가
본인을 소개하는 글 중엔 이런 단어가 쓰여 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텍스트를 띄우고,
세상과 사람과 얽히고자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
무엇을 묻고 무엇을 듣고자 하는지
성기완 선배를 만나
지나온, 그리고 지나갈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안녕하세요. 본인 소개를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성기완입니다. 인문대학 불어불문학과를 나왔고, 1993년에 현재 미디어 아티스트인 권병준 등과 함께 한국 최초 얼터너티브 락밴드인 ‘토마토’를 결성했었고, 1994년엔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 ASSA를 거쳐 현재는 아프로 아시안 일렉트로 팝밴드인 트레봉봉(TRESBONBON)으로 활동하고 있고, 계원예술대학에서 강의를 겸하는 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인 성기완과 함께 3호선 버터플라이의 리더였던 성기완을 기억할 것 같아요.
학부 시절이 어떠셨을지 궁금한데, 불어불문과에 진학하게 된 배경이 어떻게 되나요?
제가 불어불문학과 86학번인데, 사실 한 번 재수를 했어요. 당시엔 입시가 선지원 후시험이 아니라 시험을 먼저 보고 그 뒤에 지원하는 방식이었는데. 어떻게 말하자면 전공과 적성보다 점수에 맞춘 진학도 쉽게 이루어졌죠. 저도 불문과를 지망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원래는 문학하고 역사에 크게 관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문학 계통의 과를 갈까, 사학과를 갈까 고민했었고 고등학교 때도 불어가 아니라 독어를 배웠었어요. 그런데 재수를 하게 됐고, 그 시기에 프랑스 문학과 불문과에 관심이 생겨서 오게 됐죠. 그런데 와서도 방황을 많이 했어요. 다들 너무 수준이 높아서(웃음). 그땐 음악은 고사하고 시인이 된다는 생각도 못했었고, 막연히 그냥 문학계에서 일하거나, 인문학을 다루는 어떤 일을 해보겠다고 생각하고만 있었죠.
그렇군요. 그런데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신 후에 동대학원까지 수료하셨는데,
그러기 위해선 상당한 학문적 욕구가 있어야만 하지 않나요? 공부를 계속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하네요.
그러게요. 제가 결코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불어불문학과에 와서 성숙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학과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할 때, 많은 선배들과 활발하게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였어요. 이때의 경험들이 제가 깨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할 수 있겠네요. 문학평론가였던 김현(김광남) 선생님을 비롯해서 지금은 문학실험실에서 실험적인 문학을 하고 계시는 이인성 소설가님, 이런 여러 선배 선생님들의 가르침이 생각의 발단이 되었어요. 지금의 이성복 시인, 진형준 교수와의 교류도 잦았었고. 거창한 연설이나 강의가 아니라, 한두 마디씩 던지시는 술자리 담화, 나누는 이야기의 맥락들이 제게 영향을 크게 줬습니다. 어떤 문학의 존재의식이랄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고민하게 됐어요. 어쨌든 이 때 문학에 대한 열정들이 생겨서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뒤 대학교 4학년 때 대학 문학상도 받고 그러며 진로로도 애착이 생기고, 학문으로서의 시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겠다고 했죠. 그렇게 프랑스 현대시를 전공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시인으로 등단한 시기와 음악을 시작한 시기가 거의 비슷해요. 음악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나요?
방위로 군 복무를 한 다음 돌아와서, 불어불문학과 내 스쿨 밴드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당시 시대 분위기가 굉장히 엄혹해서 편안하게 밴드를 하기는 힘들었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 몇 명이 모여서 밴드를 만들고 유지하고 있던 거죠. 제가 전부터 기타를 쳤거든요. 이걸 알고 밴드를 하던 선배들이 불러준 덕에 학내에서 밴드를 하기 시작한 게 약간 대외적인 음악 활동의 첫걸음이겠네요. 그리고 제가 중·고등학교 때부터 음악을 듣는 것도 무척 좋아했었는데, 음악 감상의 지평을 지속해서 확장해나갈 방법을 계속 찾고 있었어요. 특히 박사 과정쯤 제 성향을 들여다보니, 가만히 앉아서 학문만 할 수는 없더라고요. 마음이 밖으로 나돌았다고 하나요(웃음). 얼른 박사 수료를 해야지, 생각하고 외적인 활동들을 더 추구하다 보니, 그 당시 한국 음악 문화 지형도 안에서 활동하던 후배들이 많던 공간에 마음을 쏟게 됐어요. 그게 지금의 홍대 인디신인데 아직 무르익지 않았던 시기였죠. 그때 인디 레이블이라는 90년대적인 문화 생산 방식이 시작되었는데, 쉽게 말해 DIY 같이 본인이 직접 생산부터 유통을 하는 거예요. 1994-95년쯤 저도 딱 박사과정 수료하고, 앞서 말한 권병준이란 친구와 ‘강아지문화예술’이라는 인디 레이블을 만들었어요. 처음엔 뮤지션이라는 생각까지는 못했습니다. 언제나 관객의 입장이었는데, 뭔가를 굉장히 좋아하면 나중에 자기도 모르게 그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제 솔로 앨범도 내게 됐고, 99라는 밴드를 하기도 했고. 어쩌다 보니 음악계에 뛰어들 때쯤 등단을 하게 돼서 첫 시집도 나왔어요. 그때부터 분명 시와 음악, 제 인생이란 나무의 큰 두 가지가 자라긴 했지만, 처음부터 둘 다 업으로 생각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정말 ‘어쩌다 보니’와 ‘마냥 좋아서’였죠.
그 당시에 ‘강아지문화예술’에 허클베리핀이라는 밴드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 때 그 밴드의 보컬이 남상아씨였어요. 그런데 남상아씨가 탈퇴를 하게 돼서, 그걸 기회라고 생각하고 함께 음악을 하자고 제안해서 98년 3호선 버터플라이를 결성했어요. 지금은 음악의 저변이 넓고 잘하는 사람도 많고. 특히 전공으로 실용음악과가 있다 보니 능력적으로 어떤 최소한의 스탠다드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도리어 그 시기 처음 대중음악을 할 때는, 아무것도 없어도 이상하게 자신감이 넘치는 거 있죠. 헤비메탈 개러지나 얼터너티브 락을 접하면, 사실 기술, 기교적인 것보다는 정신이 중요하잖아요. 그 시대를 대표하는 너바나(Nirvana)를 보더라도, 연주의 정교함, 실력보다는 어떤 태도, 열정과 거기에 실어낸 의미로 소통하는 음악이니까. 우리도 시도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있었어요. 이 사회의 자유로움의 혜택을 받고 자발적으로 일으키게 되는 것, 맨땅에 헤딩하기가 존재 이유가 되는 그런 음악. 시대정신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음악을 시작하실 때는 맨땅에 헤딩하기라고 하셨지만, 당시 문학과지성사의 무크지 ‘이다’의 편집위원을 하시기도 하셨고, 여러 방송계에서도 일을 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사회적으로 이미 어느 정도 능력을 인정받고 계셨던 게 아닐까요?
글을 쓰고 편집하는 일도 계속 했었지만, 시기적으로도 기회가 많았죠. 음악채널로 유명한 MTV가 처음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을 때, Alternative Nation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었어요. 해외 음악의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제가 방송시간 중 몇 시간을 할당받아서 VJ(Video Jockey)로 활동하게 됐어요. 저도 마찬가지였고 그 시기 사람들이 비주류 해외 음악을 접할 기회가 얼마나 많았겠어요. 제가 잘 알고 있어서 프로그램을 했다기보다 활동을 하면서 오히려 덕질이라고 해야 할까, 제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원 없이 보고 듣는 시간이었죠. 특히 맨체스터 사운드로 불리는 영국 팝들 뮤직 비디오가 엄청나게 있는 거예요. Oasis, The Stone Roses, Happy Mondays... 제가 보고 싶던 뮤직 비디오들을 찾아보고, 또 전자음악이 실험적인 단계이던 시기라 새로운 것들을 들어볼 수도 있었고요. 개인적으로 소장하려고 따로 비디오를 녹화해두기도 하고. 사실상 시청률은 바닥에 수렴했지만(웃음). 그리고 대중문화에 그렇게 몸담고 있게 되며, 현재 대중음악 평론가인 신현준씨와 함께 서울사회과학연구소에서 문화 연구를 같이 하게 되기도 했어요. 그렇게 음악 비평 동인 얼트 바이러스(alt. Virus)를 만들고, 웨이브(Weiv)라는 음악 비평 웹진을 만들어서 기고도 하고. 제가 능력과 전문적 지식을 다 갖추고 있어서 일을 해왔다고 보기보다는 관심을 가지고 뛰어들다 보니 얄팍하지만 한 겹씩 쌓여오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네요.
웹진에 있어서도 대선배님이시군요. (웃음) 원론적인 질문일 수도 있지만 본인에게 있어서 노래를 적고, 글을 쓰는(써야만 하는) 것에 나름의 의미가 있으신가요?
꾸준히 해온 일이지만 우선 음악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나의 어떤 그리움과 애착이 빛을 발할 수 있는 분야에요. 가사를 적고 부르면서 부끄럽지만 마음을 내놓을 수 있는. 그리고 시와 글은 제게 조금 다르게 생각돼요. 글로써 문장을 적고, 이를 통해 담론을 형성하는 것은 마치 의무사항처럼 느껴집니다. 애초에 내가 학교를 나와서 검증되고 잘나진다기보다는, 그 과정 자체가 사회의 기반과 자원을 통해서 사회가 내게 시간을 맡겨둔 것만 같이 느껴져요. 이런 기회를 받아서 공부를 하고, 지적인 베네핏(benefit)을 누리기 때문에 그 기회가 당연한 게 아니란 걸 계속 상기하고. 그래서 다시 글을 쓰고 생각을 표출하는 게 제가 누린 가치들을 외부로 환원하는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글이라는 것은 예술에 비해, 조금 더 활용하고, 활용당하는 도구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권력화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서 사용해야 돼요. 자기의 이득을 쌓는 방향이라기보다 더 큰 의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글은 이런 의무감을 지니고 있어서, 순전히 사랑하는 것 자체인 음악과 달라요. 이와 달리 시는 제게 글이자 음악이자, 둘 사이의 봉합 아교와 실 같은 존재예요. 그래서 시와 시인은 글자들로 완성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 시적인 태도, 삶의 자세라고 말할게요. 사랑과 의무 사이 무너지지 않게 나를 버텨주는 의자. 이런 의식은 시인 아버지를 두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받게 된 것 같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비슷하게.
가장 중요한 질문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잘 지내니” 이렇게 안부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안부는 크게 세 방향으로, 타인에게(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내가 지금 하는 일에게 할 수 있어요. 안부는 대답을 구하는 거죠. 그런데 솔직한 대답을 처음부터 들을 순 없어요. 대답을 안 할 수도 있고, 내밀한 얘기까지 들을 수 없을 수도 있고. 그런데 꾸준히 진심으로 질문을 건네다 보면, 언젠간 대답을 표정만으로도 얻을 수 있죠. 그리고 그걸 보고 지금 내가 함께 밥을 먹어야 할지 도서관을 가야 할지 알 수 있고. 몸 담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도, 지금은 시와 음악이라는 장르에 대해서 평생 하고 있는 업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내겐 그 대답을 받을 수 있는 것 또한 음악의 형태에요. 제 음악을 듣는 사람이 있으면 그 존재가 질문이 되기도 하고 대답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시와 음악, 예술에 전 엄청난 걸 담는 것이라기보다 그 자체가 자문이자 질문이에요. 그 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뜻이 뻔한 질문을 하지 않기 위해, 겉도는 답을 얻지 않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언어적인 실험도 하고 새롭게 말을 건네면서, 상업화되지 않고, 선입관을 형성하지 않을 수 있도록.
안부를 묻고 답을 찾아간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네요. 개인적인 궁금함인데, 근래 독립 출판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지고, 브런치, 씀과 같이 접근성 높은 문예 플랫폼도 많이 등장하고 있잖아요. 이렇게 텍스트가 소비되는 방식이 다양화되고 변해가는 것에 대한 소견이 있다면?
좀 뜬금없을 수도 있지만, 최근 1인 미디어상에 ASMR 콘텐츠 같은 게 대표적으로 개인적 체험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그런 것을 더 적극적으로 필요로 하고, 영향력이 커지고. 문학이 되게, 이스터 석상처럼 공고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글에 있어서 더 개인의 소소한 것들을 묻고, 개인화된 경험을 가치 있게 여기게 된다면 가볍게만 바라볼 수는 없죠. 어떻게 보면 휘발성이 강할 수도 있지만, 작품성을 판단하는 잣대는 완결성뿐 아니라 그 자체의 의미에도 있으니까요. 순간 느낄 수 있는 달콤함이 너무나 중요한 흐름이라면, 이를 적극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 안에서 우리가 놓치던 감정이 되찾아지는지, 아니면 점점 무언가 잃어버리는지를 지켜봐야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더 많이, 다채롭게 질문하고, 일면적으로 대답을 듣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듣고 사회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알려주는 지표라고 생각해요. 이면지 뒤에 적힌 시처럼. 평소에도 앱 등으로 나오는 글쓰기 서비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음악과 시, 텍스트를 통해서 위로와 위안을 얻고 답을 구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까 뻔하지 않은 답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첫 앨범을 보면 음악과 시를 결합한 형태의 실험적인 노래도 보이고, 해 오신 장르의 지평도 굉장히 다양한 것 같아요. 앞으로도 어떤 시도를 해보고자 하시나요?
단지 새롭고, 쿨해보이기 위해서 실험을 한다기보다, 마음을 열어두고 싶어요. 마음을 열면 목소리가 들립니다. 모더니즘의 사조가 가진 문제의식과 이에 대한 태도, 방법을 든다면, 뒤샹이 레디메이드를 묻는 방식에 대한 새로움을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처럼. 이런 변화를 문제 삼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제 하나의 요청사항이에요. 다만 변화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선 변화 자체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첨단만을 강조하는 폐해라고 생각해요. 애초에 마음을 열어둔다는 건 과거를 끌고 오기도 하고, 주변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하며 시작됩니다. 오히려 먼 미래, 타국이 아니라 흘러가는 일상 안에 본질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시에 있어서도 일상의 편린을 형태적으로 담아내는 시도를 해보기도 하고. 예를 들어 한 자연생태공원이 있다면 선명하게 드러나는 꽃도 있고, 무언가를 빗대어 대상화 할 수 있는 나무도 있고, 출입 금지 지역이 있을 수도 있고. 정리되지 않고 웅덩이가 파여 있는 무질서와 임의성도 있는 거죠. ‘ㄹ’이란 시집 전체가 생태공원이라면 배치가 어떨지 표현했었어요. 그래서 시들을 전체적으로 보면 어느 한 부분에 산문적인 웅덩이가 존재하기도 하고, 의도적인 ‘출입금지구역’이 영역을 차지하기도 해요.

음악적으로는 지금 밴드 트레봉봉(TRESBONBON) 세션맨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 다른 설명이 없더라도 다양한 만남들 속에서 어떤 소리가 나오고, 부딪치고, 긴장하고, 화합하는 하나하나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모습을 그려요. 저희 멤버는 아미두라는 아프리카 사람도 있고 저 같은 50대 아저씨도 있고, 다른 2-30대 여성 멤버로 이루어져 있어요. 처음부터 이렇게 구상한 게 아니라 서아프리카 뮤지션인 아미두가 마침 한국에 사는 걸 알게 되어서, 생계를 위하면서도 디자인되지 않은 자유로움을 함께 추구할 수 있겠다 해서 모인 거죠. 음악의 존재 이유 자체가 전 시간 동안 울려 퍼지는 소리를 공유하고, 억압되고 박제되지 않은 자유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 저부터가 자유로움에 공감하고, 더 재미있는 걸 찾고 싶고. 물론 그 방향을 위해 더 대중적인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 최근엔 예능 프로그램에도 섭외를 받아서 찍었었어요(웃음). 이런 저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소통할 수 있는 재밌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
재밌는 것을 찾아서 창작 활동을 하는 것을 동경할 수도 있지만, 마냥 따르기도 어려운 것 같아요.
음악가와 작가로서 느끼는 현실적인 장벽은 없나요? 있다면 어려움과 어떻게 타협하고 무엇을 좇아야 할까요?
그렇죠. 결국 무엇이든 음반을 내고 책을 쓰고 결과물이 나와야 하고. 저도 지금은 계원예대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지만 그러기 시작한 게 2009년, 제가 43살 때에요. 그전까지는 닥치는 대로 어떤 일이든 했어요. 출판사도 6개월 다녀봤고, 번역일도 맡고, 편의점 알바도 하고 술집에서 DJ를 하기도 하고. 정말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기업에 취직을 하거나 공무원이 된다면, 다른 데 몰두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런 선택만은 피했어요. 그렇게 창작 생활을 하는 최소한의 공간과 자금만을 갖추면서. 아주 돈이 없을 때는 악기를 조금씩 팔면서 지낸 적도 있어요. 그걸 어렵다고 하면 어려웠고, 즐거웠다면 즐거웠지만,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 ‘가능하다’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정해진 통로를 지나는 식의 삶만이 유일하게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에요. 가능하다면 어떤 삶이든 방법 중에 하나가 되니까요. 식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때론 우리가 정해져 있는 길 중에 선택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인문학에 있어서도, 인문학을 전공하면 먹고 살기도 힘들고, 무가치하다는 회의감에 휩싸이기도 쉽죠. 하지만 결국 모두 넓은 시야로 볼 때 창작과 인문학적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을 테고, 특히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도들한테는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뭔지에 대해 자기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두 각자에게 가장 귀한, 소중한 일을 하는 데도 불구하고 보상이 되지 않아서, 생활을 영위할 수 없어서 포기해야 하는 여건이 안타깝습니다.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 타국으로 나가야 하기도 하고. 하지만 누군가는 스스로의 그 고귀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 눈앞의 고됨에 잠식되거나 반대로 자기 가치에 너무 잠식되지 않도록 균형점을 잡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어요. 사회적인 성공, 일반적으로 추구되는 명예, 부만큼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우위에 두고 있는 이들의 힘에 의해서 세상이 존재하고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도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요. 같이 호흡하고 서로를 알아보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수치적으로 정량화된 평가가 아니라 헌신의 정도, 기여의 정도를 평가할 수 있는 사회적 기준이 마련되리라고 봅니다.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한다면 결국 갖게 될 의문 대신, 좋아하고 눈길이 가는 것에 안부를 물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불어불문학과를 희망하는 고등학생들에게, 나아가 문학과 예술을 동경하고 꿈꾸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꼭 잘 지내니라고 안부를 물어봐 주세요. 인문학, 모든 학문은 그에 대한 대답을 기꺼이 줄 겁니다. 그리고 예술이나 학문 모두 내가 앉은 자리부터 시작해요. 공연을 보기 위해 옷을 잘 차려입고 콘서트홀에 가지 않더라도, 철길 근처에서 기차 소리가 들린다면 그 리듬들이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는 반복적인 형태가 조형적인 선율이 될 수 있죠.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데 할머니가 박스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가고 있다면 어떻게 할지 묻게 되죠. 예술이든 학문이든 앉은 자리에서 어떤 관련이 있을지. 학술발표와 콘서트장이 아니라 누군가 필요로 하는 대답을 줄 수 있는 모든 상황으로부터 나아갑시다. 마지막으로 제가 힘들 때 되새기는 아시스의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 중 한 문구가 있어요.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세요.’ 나 스스로를 반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가 되어줍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을 하고, 학문을 하고, 생활을 한다면 좋겠습니다.

